가짜 노동으로 고통받았던 이야기

가짜노동

대학교에서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을 꼽으라면 단연코 캡스톤 디자인 수업 처리하는 것이었다. 캡스톤 디자인 수업은 고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팀과제 수업으로 진행하는 수업을 의미한다. 국가 주도 사업이기 때문에 국가 지원금이 나온다. 덕분에 학생들은 국가 지원금을 사용해 팀 프로젝트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거나 식비로 사용할 수 있다. 공대나 미대 혹은 프로젝트를 수행하기에 적절한 학과는 지원금 사용이 수월했지만 인문대는 마땅히 비용을 사용하기도 어렵고, 프로젝트도 딱히 없다. 그래서 캡스톤 디자인 수업을 할 때면 캡스톤 담당자와 매번 씨름을 하곤 했다. 담당자는 다른 학과의 보고서를 보내주며 다른 학과 학생들은 보고서의 양이 넘쳐나는데 우리의 학과는 보고서의 양이 너무 적다며 보고서를 반려했다. 공대는 실험하고 프로그램 돌리니까 보고서에 쓸 게 무수히 많았다. 그에 반면에 행정학으로는 아무리 주제를 잘 선택한다고 한들 공대와 비슷한 결과물을 낼 수 없었다. 결국 꾸역꾸역 학생들을 다그쳐 보고서의 양을 늘려 억지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허무함을 느꼈다. 정말 많은 학과들이 방대한 양의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과연 누가 이 보고서들을 검토할까? 국가 주도 사업이니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에서도 보고서를 제출할 것이다. 그리고 애써 만든 이 보고서를 보기는 할까? 그냥 제출해야 하니까 형식상의 보고서가 아닐까? 열심히 보고서를 만든 학생들의 노력과 그 보고서들을 잘 정리하여 수합한 내 노력이 무용지물이 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매 학기마다 캡스톤 디자인 수업을 보면서 불쾌감을 느끼곤 했다.

<가짜 노동>은 내가 느꼈던 형식상의 노동이나 직무태만 등 실질적인 노동이 아닌 의미 없는 노동에 대해서 비판하는 책이다. 가짜 노동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해당 책에는 다양한 사례의 가짜 노동이 나와있다. 덕분에 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나처럼 무의미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람의 사례였다. <아무도 읽지 않는 연례 보고서>라는 작은 제목으로 소개된다. 키르스텐이라는 여자는 기업의 홍보 책임자로서 기업의 연구 성과를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의 설명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나는 경영진을 위해 연례 보고서도 만들어요. 다양한 팀에서 정보를 모아서 만들죠. 나와 동료들은 아마 1년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시간을 그 작업에 쏟을 거예요. 열심히 쓰레기를 만드는 거죠. 아무도 안 읽으니까요. 작년에 만들었던 200부가 아직 지하에 있어요.
<가짜 노동>, p208

이렇게 무의미한 가짜 노동을 줄여서 더 중요한 일에 투입되거나 여가 시간을 늘려 삶을 더 풍요롭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짜 노동을 줄이기 위해서는 기업에서 선택권이 있는 윗선에서 가짜 노동을 줄이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책에서 소개된 넷플릭스 인사팀의 결정이 그러하다. 넷플릭스는 오로지 성과에 집중된 선택을 하기 때문에 무의미한 일에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은 여전히 가짜 노동에 많이 노출이 되어있고, 이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을지 의문이긴 하다.

책을 덮고 나면 가짜 노동뿐만 아니라 진짜 노동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가짜 노동의 정의가 적확하게 나와있지 않아서 진짜 노동에 대한 기준도 애매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사람마다 가짜 노동과 진짜 노동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형식상의 보고서를 만들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서 돈을 벌고, 실적을 올릴 수 있어서 만족할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진짜 노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이 단순 반복하는 일이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일로 경제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진짜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노동에 대한 기준이 다르므로 각자 자신에게 맞는 노동의 기준을 설정해 봤으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