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

나도 엄마가 되어보니, 이제야 보이는 엄마의 하루.

by 꽃하늘

따뜻한 밥은 늘 ‘엄마’ 덕분이었다.


1990년대엔 전기밥솥이 있긴 했지만 예약 기능은 없었다.
쌀을 씻어 넣고 아래로 내리는 버튼이 있었던 것 같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쯤, 엄마를 돕는다고 밥을 두어 번 지었던 기억이 있다.

뭐랄까, 도와준다는 ‘시늉’? ‘흉내’?
그 정도가 딱 맞는 말일 거다.

난 중·고등학교 때까지도 전기밥솥에 따뜻한 밥이 항상 있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배고플까 봐 자녀들을 위해 미리 밥을 지어두신 엄마.

지금의 나는 밥솥에 밥이 떨어지지 않게 해두는 것조차 어렵다.


엄마는 늘 마지막에, 혼자 드셨다.


엄마는 늘 식구들이 식사를 다 끝낸 뒤,
큰 밥그릇에 밥과 반찬을 가득 담아 혼자 드셨다.

남편과 자녀들을 챙기느라 마음 편히 밥 한 숟갈 뜨기도 힘드셨던 것이다.
그땐 몰랐다.
엄마가 우리 몰래 맛있는 걸 드시는 줄 알고 엄마 그릇을 들여다보곤 했다.

“엄마, 우리 몰래 맛있는 거 먹지? 왜 같이 안 먹어?”

지금 생각하면 참 철이 없었다.


엄마의 밥상은 유기농을 넘었다.


소시지를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이고
외식 한 번이 간절했던 어린 시절.
우리는 대부분 엄마가 직접 농사지은 제철 음식만 먹었다.

여름이면 늘 들리던 말씀.
“옥수수 삶아 놨다, 먹어라!”
큰 냄비에 가득한 옥수수.그 말만 들어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옥수수가 10개는 훌쩍 넘어 보였다.

엄마는 매년 여름마다 옥수수를 삶으셨고,

나는 매년 여름마다 한 개 겨우 먹는 게 다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근성도 엄마를 닮은 건가 보다.

그땐 몰랐지만,
건강한 제철 재료를 직접 농사지어 먹게 해주신 건
엄마가 우리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더 유기농보다 유기농’으로 살림하신 덕분이었다.


사춘기 딸의 짜증도 말없이 받아준 사람.


사춘기 시절,
괜한 짜증을 엄마께 쏟아냈을 때
엄마는 묵묵히 들어주셨다.

그땐 엄마가 나에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딸의 마음이 잘 지나가도록 말을 아껴주신 것이었다.

엄마도 속상하셨을 텐데 어떻게 참으셨을까.
나도 말보다는 듣는 게 편한 편인데,
그것도 엄마를 닮은 걸까.


밤 9시, 모두가 잠들던 집.


우리 집은 밤 9시면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강한 생활습관.

그때 나의 소원은
“밤 11시에 한 번만 자보는 것”이었다.
지금 내 아이가 들으면 웃을 소원이겠지만,
그땐 그게 참 간절했다.


가족여행 대신 도나스와 목도리.


친구들처럼 나도 가족여행이 가보고 싶었다.
“엄마, 우리도 가족여행 가면 안 돼?”
엄마는 늘 짧게 대답했다.
“그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짧은 대답 안에
속으로 혼자 많은 말을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여행은 가지 못했지만 엄마는 본인의 재주로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셨다.

핑크색 목도리를 뜨개질하며 마법처럼 완성해 가셨고,
겨울이면 가디건, 장갑, 목도리가 차례로 완성됐다.

전날 아랫목에 반죽을 숙성시켜
다음날 ‘도나스’를 튀겨주시던 날.
바삭한 소리와 고소한 냄새,
설탕 듬뿍 묻은 그 도나스는 세상 최고의 간식이었다.


운동회 날 새벽부터.


학교에서 운동회가 있는 날,

엄마는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을 말고 계셨다.

그땐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엄마는 본인의 잠을 줄여가며 정성껏 준비하신 거였다.


엄마는 늘 34살이었다.


“엄마, 몇 살이야?”
“34살!”

해맑게 웃던 그 시절.
어느새 나는 엄마가 말하던 그 나이를 훌쩍 넘겼다.
그땐 엄마는 처음부터 나의 엄마였던 줄로만 알았다.


우리는 자주 연락하는 모녀는 아니지만.


엄마와 나는 살가운 모녀 사이는 아니다.
아빠께서 “다른 모녀들은 서로 아껴주고 못 살던데, 둘은 왜 친하지 않니?”라고 하신 적도 있다.

서로 큰일이 있을 때만 연락을 주고받았고, 엄마에게 연락이 오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부터 됐다.


마음이 큰 부자로 키워주신 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아진
엄마의 시간을 생각해 본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진 않았지만
없어지지도, 닳지도 않을 ‘마음’을
가득 담아 키워주신 엄마.
그게 더 어려운 일이라는 걸,
나도 엄마가 되어보니 이제 알겠다.

어른이 된 나는
힘이 들 때마다 유년 시절의 기억을 꺼내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다음 생엔, 내 딸로.


아기였고, 어린이였고, 소녀였고,
고운 젊은 여성이었을 우리 엄마.

종교는 없지만,
이 세상 어딘가 신이 있다면
다음 생엔 엄마를 내 딸로 태어나게 해줬으면 좋겠다.

실컷 공부하고 싶어 하셨던 그 마음.
내가 다 뒷바라지해드리고 싶다.


영어 노래를 부르며 웃고 계신 엄마.


이제 70세 가까운 엄마는
주민자치센터에서 영어 노래도 배우시고

청년 학교에서는 검정고시 공부를 하시면서
영어 노래도 외워서 녹음해 보내주시곤 한다.

“엄마, 정말 대단하세요.”
칭찬 한마디에 신나서
노래 두 곡을 더 보내신 엄마.
많이 행복해 보이셨다.


고맙습니다, 이번 생엔 내 엄마여서.


다음 세상에서 만나면 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영어 노래 가사를 하나하나 읽어드릴게요.

이번 생엔 엄마였던 당신,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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