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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쓴 Jun 08. 2023

하고 싶은 게 없다는 거짓말


  지난달에 중학교 동창인 J가 우리 집에 놀러 왔었다. 중학교 때 친구이니 알고 지낸 지는 20년이 넘었지만, 중학교 졸업 후에 만난 횟수는 그리 많지 않다. J와는 중학교 내내 붙어 다녔지만, 고등학교를 인문계와 상업계로 각각 진학했고, 나는 4년제 대학을 다니고 취업 준비를 오래 했고, J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일찍 일을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일상의 공통점이 없어 멀어졌지만 간간이 연락하며 지내던 친구였다. 내가 취업 준비와 자격증 공부와 과외로 바쁘기 전까지 1~2년에 한 번 정도 씩은 만났던 것 같다.


  20대 중반쯤엔가 내가 J에게 물은 적이 있다.


"넌 하고 싶은 게 뭐야?"


  몇 초 가만히 있던 J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난 하고 싶은 게 없어."


  J에 대답에 그때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때까지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늘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하고 싶은 일들에 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들 나처럼 하고 싶은 게 많은 줄 알았다. 하고 싶은 게 없다는 J의 말에 '아, 나는 내 기준에서만 생각하고 있었구나. 나와는 달리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들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렀다. 현재 J는 6살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30대 들어서는 아이 때문에 밖에 나올 수 없는 J를 보러 내가 집으로 가끔 놀러 가곤 했었다. 이제는 아이가 어린이집도 가고 태권도 학원도 가서 시간이 조금 생겼다며 내가 독립한 집에 놀러 오고 싶다고 했다. 그날 나는 오후 반차를 냈다.


  밖에서 같이 점심을 먹고 커피를 사서 우리 집에 들어왔다. J는 내가 내 취향에 맞게 꾸며놓은 집을 보면서 연신 너무 예쁘게 잘 꾸며놨다며 나보다 더 신나했다. '나도 결혼하기 전에 꼭 혼자 살아보고 싶었는데..' 하면서. 요즘 근황 얘기를 하는 중에 내가 요새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있다고 얘기하는 부분에서 J는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본인의 어릴 적 얘기를 했다.


  어렸을 적 J네 집은 많이 어려웠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J네 집에 놀러 갔을 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J는 달동네 언덕배기에 천장이 낮고 좁은 허름한 집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J도 우리 집에 처음 놀러 와서 놀랐었다고 했다. 우리 집이 엄청 크고 넓어서. (우리 집은 6식구가 사는 방 3개 있는 오래된 집이었다.) 다른 친구네 집에 놀러 가본 적이 없던 J는 다른 친구들도 다 자기네 집 같은 곳에 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J는 집이 너무 어려워서 초, 중, 고 통틀어 단 한 번도 학원에 다녀본 적이 없었다 했다. 한 번은 초등학교 때 피아노 학원이 너무 다니고 싶어서 엄마한테 매일 같이 졸랐다고 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피아노 학원을 보내주지 않았고, 한동안 피아노 학원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봤어야만 했다.



  J가 했던 '난 하고 싶은 게 없어'라는 말의 의미를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알았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본인도 거짓말인지 몰랐던 거짓말. 하고 싶은 게 없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는 환경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저 나는 하고 싶은 게 없는 것이라 스스로도 속이며 살아왔던 것이다. 피아노 외에도 독립 후 내가 요새 하는 취미들에 관한 얘기를 듣는 J의 눈이 계속 반짝반짝했다.


  학창 시절에 나는 미술을 하고 싶었다. 그림 그리는 걸 가장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는 미술로 상을 많이 받았고, 중고등학교 때는 미술 점수가 가장 좋았다. 하지만 주변 어른들은 국, 영, 수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게 가장 좋은 거라 했다. 미술 해서 밥 벌어먹고 살기 힘들다 했다. 어른들이 다들 그렇게 얘기하니 그런 줄 알았다. 말 잘 듣던 나는 국, 영, 수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갔고 경제학을 전공했고 노무사를 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라는 생각은 어느새 까마득히 멀어져 있었다.


  주변에 (혹은 본인이) '나는 하고 싶은 게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 말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게 없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는 상황들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 온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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