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놀쓴 Aug 10. 2023

세월은 가고 추억은 남고

  본가가 있는 동네는 오랫동안 재개발지역이었다. 내가 유치원 시절부터 해서 대략 30년을 그 동네에서만 살았다. 그보다 어릴 적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는 없으니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그 동네에서 보낸 셈이다. 현재는 독립해서 회사 근처에서 살고 있지만, 부모님과 동생은 여전히 그 동네에서 계속 살고 있다. 내가 많이 바뀌어온 세월 동안 동네는 더욱 빠르게 바뀌어갔다. 하교 후 친구들과 술래잡기하면서 뛰어다녔던 담장 낮은 집들 사이사이 좁은 골목의 모습이 아직 생생한데, 그 술래잡기하던 골목집들은 이제 번쩍번쩍한 새 아파트들로 바뀌었다. 그리고 근 몇 년간 어렸을 때부터 자주 다녔던 오래된 가게들이 하나씩 문을 닫는 모습을 보고 있다.


  기억에 남는 오래된 가게는 먼저 초등학교 근처 문방구였다. 초등학교 때 늘 그 문방구만 다녔었는데 졸업 후에도 오랫동안 문방구는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내가 20대 중반쯤엔가 살게 있어서 그 문방구를 들렀는데, 주인아저씨가 나이가 많이 드셨다는 게 느껴졌다. 혹시나 나를 알아보실까 싶어 조금 빤히 쳐다봤는데, 말없이 가만히 물건만 사고 나갔었던 조그만 꼬맹이의 다 큰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냥 그때처럼 필요한 물건만 사고 나왔다. 그 후 몇 년 더 지난 뒤 지나가다 보니 문방구가 없어져 있었다.


  그다음은 빵집이다. 여기도 초등학교 때 자주 가던 빵집이었는데 '베이커리'라는 누렇게 바랜 간판을 달고 오랫동안 영업을 하고 계셨다. 초등학생 때 엄마에게 받은 꼬깃꼬깃한 돈을 가지고 그 빵집에 들어섰을 때의 빵 냄새가 좋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 가족들 생일 때마다 케이크도 늘 그곳에서만 샀었다.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는 밖에 나돌아 다니고 집에 있는 일이 없다 보니 동네 빵집 갈 일도 없어졌다. 워낙 빵을 좋아하지만 내가 다니는 곳 주변에 눈에 띄는 파리바게뜨만 주로 가게 되었다.


  가장 바쁘고 힘들었던 20대 후반~30대 초반 시절, 과외를 마치고 밤늦게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 버스 창밖으로 그 빵집 간판에 불이 켜진 게 보였다. 웬일인지 그날은 바로 버스에서 내려 빵집에 들어갔다. 빵집 내외부는 내가 초등학생이던 20여 년 전과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요즘 프랜차이즈 빵집 같은 잔잔한 음악과 예쁜 조명도 없고 전체적으로 약간 낡아 보이는 오래된 빵집. 밤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진열대에 빵은 한가득 쌓여있었고 주인아저씨는 20년 전처럼 혼자 앉아 TV를 보고 계셨다. 늦은 시간에 혼자 쭈뼛쭈뼛 들어가 몇 가지 종류의 빵을 (쟁반이 아닌) 바구니에 골라 담고 나니 아저씨가 서비스라며 어릴 때 자주 먹었던 크림빵 하나를 더 넣어주셨다.


  또 몇 년이 더 흘렀다. 들리지는 못했지만 지나갈 때마다 보면 빵집은 늘 그 자리에 한결같은 모습으로 있었다. 그러다 재작년 인가.. 주변에 가게들도 거의 다 없어지고 그 빵집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을 무렵, 그 빵집도 곧 문을 닫았다. 지나갈 때 보면 손님이 있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는데 결국 저기도 이제 닫는구나 하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얼마 전 본가에 다녀왔는데 동네 약국의 문이 닫혀있었다. 그리고 약사분께서 쓰신 메모 하나가 붙여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이 약국도 자주 가진 않았지만 항상 왔다 갔다 하면서 늘 지나치던 약국이었다. 그냥 당연하게 늘 그곳에 있었던 약국. 주변에 가게들도 다 문을 닫고 재개발로 사람들이 다 이사를 가고 공사를 하는데도 홀로 우두커니 서있던 약국. 그 약국도 이제 문을 닫는다 한다. 내 기억으로는 한 20~30년 정도 있었나 싶었는데, 무려 "50년"을 그 자리에서만 계속 약국을 하셨다고 한다.


  앞서 문방구나 빵집 같은 경우에는 뭔가 아쉽긴 하지만, 원래 가게들이 오래되어 닫을 수도 있고 주인아저씨들이 거의 50,60대 정도라 아마 다른 동네 가서 다시 가게를 열거나 다른 일을 하시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약국의 경우 그 한자리에서만 무려 50년을 하셨다니... 그리고 이 약국의 약사분은 할아버지도 아니고 할머니시다. 몇 년 전에 약국을 들렀을 때 정정해 보이셨는데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신 건가 싶기도 하다. 소문(?)에 의하면 자식들이 다 의사라고 한다. 어쨌든 인생의 거의 절반 이상을 한 장소에서 일하다니.. 어떤 느낌일지, 또 그것을 그만두었을 때도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잘 안 간다. 게다가 50년을 하신 약국을 그만두시는 이유가 이제'늙어서'라니.. 세월이 야속하단 말은 이럴 때 쓰는 걸까.


  나는 한 가지 취미도 50년을 하기엔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한 가지 직업을 그것도 한 장소에서 50년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안 간다. 보통은 한 가지 직업(그것도 한 장소에서)을 오래 해봤자 40년 이내일 것이다. 50년이라니... '50년'이라는 숫자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우리 동네 약사 할머니를 이제 뵙지는 못하겠지만 50년의 긴 세월 동안 고생하셨다고 멋있으시다고 마음속으로 응원하게 된다. 이제 새로운 인생 2막을 잘 시작하셨으면 좋겠다. 50년 동안 약국이 있던 그 자리에 또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겠지만, 지금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겠지만, 그 자리에 있던 그 약국을 오랫동안 보아왔던 사람들의 기억 속엔 계속 남아있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하고 싶은 게 없다는 거짓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