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임원분들과 승진대상자들의 점심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대부분 집에서 혼자 밥 먹는데 오래간만에 외식이라 든든히 먹고 올 생각에 조금 신이 났다. 나는 회사 사람들과 점심을 잘 먹지도 않고, 만약 꼭 먹어야 할 일이 있어도 최대한 내 사생활 얘기는 안 한다. 그저 사람들이 말할 때 '오~ 진짜요?' 하면서 리액션만 적당히 하면 된다. 회사 사람들 여러 명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내 입은 먹는데만 쓰자는 게 나의 철칙이다.
점심 식사를 하는 도중 어떤 분이 요즘 저출산이 심각하네 어쩌구로 운을 떼셨다. 그러면서 다들 젊은 부부들한테 돈을 줘야 하네, 집을 줘야 하네 한 마디씩 하신다. 결혼이니 비혼이니 하는 단어도 간간이 들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창밖에 푸르른 나무들을 감상하며 우걱우걱 고기를 씹는다. 날씨도 좋고 배도 부르고 잠이 솔솔 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갑자기 생뚱맞게 화살이 나에게로 날아왔다. 저출산 얘기를 꺼내신 그분이 갑자기 나에게 '비혼은 아니지?'하시는 것이 아닌가?! 단 1~2초 만에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이랬다. " '비혼이야?'도 아니고 '비혼은 아니지?'는 뭐지? 그리고 내가 비혼인지 아닌지가 왜 궁금하지? 대답을 '네'라고 해야 할까 '아니요'라고 해야 할까? 비혼이라고 하면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어쩌고 저쩌고 할게 뻔하고, 비혼이 아니라고 하면 열심히 노력해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빨리 결혼을 하라고 어쩌고 저쩌고 할게 뻔한데... " 결국 나는 당황해서 '아...... 음.......' 하다가 '... 모르겠어요'했다. 그다음에 그분이 뭐라고 하셨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좀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나는 저 질문에 대한 답이 yes 도 no 도 아니었다. 다들 내가 비혼일 거라 생각하지만, 나는 내가 비혼주의라고 말하고 다닌 적이 없다. '딱히 결혼 생각은 별로 없다'라는 정도로만 말했는데, 사람들에게 '결혼 생각 별로 없다 = 비혼주의'라는 공식이 성립한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런데 기혼, 미혼, 비혼 이렇게 칼로 무 자르듯이 꼭 나눠야만 하는 걸까?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지?
내가 몇 년 뒤 결혼을 할지, 한 50살쯤 되어서 결혼을 할지, 아니면 평생 결혼을 안 할지, 결혼을 두 번 할지 세 번 할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신도 모른다. 그렇게 아무도 모를 일을 '비혼'이라는 단어 하나로 도장 콱! 찍어버리기엔 너무나 찜찜하고 께름칙한 것이었다. 내 상태, 상황, 마음, 생각 등에 따라 나는 언제든 변할 수 있다. 70, 80살 돼서도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있다면 결혼할 것이다. 나는 그때그때 그저 내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하고 싶을 뿐이다.
혼인 여부를 묻는 대부분의 서류에는 '미혼/기혼'에 표시하게 되어있다. 요즘의 트렌드(?)를 반영해서 '미혼/기혼/비혼'으로 나눈다 해도 별로 다를 건 없다. 대신 혼인 여부를 꼭 물어야 할 법적인 필요성이 있는 경우라면 "당신은 현재 법적으로 혼인한 상태입니까? yes or no"에 표시하게 하면 좋겠다. 지금 현재 서류상으로 법적 배우자가 있는지 없는지만 답하면 되니까 명확한 질문이다. 미혼도 기혼도 비혼도 각각의 사람들의 상황을 대변하기엔 뭔가 애매한 단어들이다. 개개인마다 다 다른 상황과 감정들을 '비혼'이라는 단어 안에는 도저히 담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