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을 해야 이탈도 하지
“지슬PD는 일탈은 해본 적 있어?”
훅 들어온 뼈 때리는 질문.
짧은 시즌제 프로그램이 끝나고 피디, 작가, 출연자 몇 명이서 소소하게 모인 술자리였다. 촬영 땐 분량 뽑아내느라, 방송 중일 땐 시청률에 일희일비하느라 늘 모두가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 서로의 피땀눈물콧물 한바가지씩 섞어 마셔 탄생한 프로그램은 막을 내려 과거의 일이 되어버리고, 시청률이란 성적표와 조금 멀어졌을 때야 비로소 그간 못했던 서로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법이다. 청약 경쟁률, 자숙 기간 에피소드, 결혼 QnA, 용한 점집, 개인 유튜브, 은퇴 후 꿈 등. 아쉽게도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야 더 친근해진 느낌이랄까. 쩝.
그렇게 위스키에, 소주에, 맥주까지 섞어 마셔 다들 취기가 오를 무렵. 그 와중에도 꿋꿋하게 하이볼 한잔으로 2시간을 버티고 있는 내가 못마땅했는지(그것도 절반이나 마셨나), 평소 티격태격 남매 같은 선배가 날 대놓고 쪼인트(?) 까기 시작했다. ‘얜 애가 너무 모범생 스타일이고, PD인데 굳이 오전에 출근해서 앉아 있는 FM 기질인 데다,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까지 있어 옆에서 보기 안타깝다’며 칭찬을 빙자한 욕으로 묘한 돌려깎기 시전. ‘어쭈 이게 많이 취했나. 왜 하필 출연자 앞에서냐고…!’ 눈으로 욕하는 찢어진 내 시선에 그제서야 ‘아이, 그러니까 형이 인생 선배로서 조언 한번 해줘요’라며 나를 위하는 척.
그중 나이 서열 원탑(하지만 외모 서열 막내)인 인생 선배가 입을 뗀다.
“에이~ 그럼 힘들어 못써. 사람이 살짝 나사를 좀 빼야 매력 있지. 술도 고거 마신 게 다야?”
“아. 제가 원래 알.쓰라서...”
“그럼 지슬PD는 일탈은 해본 적 있어?”
“일탈?? 아뇨. 전 성격상 그런 걸 하고 싶지가 않던데…요?”
“아니 왜, 막 심장 뛰고 뇌를 빼놓고 본능대로 하고 싶은 뭐 그런 거 있잖아”
“아…그래요?”
하필이면 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핵노잼 PD.
나를 소개하자면 요 한 줄로 끝난다. 날 때부터 클 때까지 쭉 노잼이었는데 눈치 없이 방송국이란 델 들어와서는 이 노잼이 부끄러움이자 PD인생 발목 잡는 대못이 되어버렸다.
왜 PD 하면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거 있지 않나. 말투나 하고 다니는 것부터가 핵인싸에, 세상만사에 관심이 많은 본투비 파워E 뼈PD들. 매일 밤 새로운 사람들과 밥과 술을 마시고, 그런 과정에서 명함 한 장 쓰-윽 들이 밀며 섭외도 하고. 낯선 곳에서 일반인들은 할 것 같지 않은 짜릿한 일들을 경험하며 거기서 영감이 퐉 떠올라 그걸로 프로그램도 메이드 시키고 뭐 이런…
...건 적어도 나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모든 PD가 다 저런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물론 주위엔 입만 열면 모두를 집중시키는 선배도 있고, 사돈에 팔촌까지 하면 대한민국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마당발 선배들도 있지만 난 하… 이 죽일 놈의 성격. 조연출 딱지 떼고 메인 연출을 하면서도 함께 고생하는 출연자와도 데면데면하고, 끝나고는 회식할까 봐 편집 볼 거 남았다며(오늘 찍었는데?) 먼저 도망가고. 어딜 데려다 놔도 입보단 귀가 더 일하는, 사고 칠 리는 없지만 재미는 더럽게 없는 그런 사람. 그런 내가. 일탈이라뇨. 설마요.
하지만 말할 기회가 주어졌다.
대문자 I, 샤이PD인 나지만 뭐라도. 이럴 땐 지어서라도 그럴듯한 일탈기를 털어 ‘저 그렇게 꽉 막힌 노잼 아니에요^-^’를 입증해 내야 한다. 뭐가 있지. 뭘 얘기하지. 아 그 얘기를 해볼까.
“저 몇 년 전에 조지아 여행을 혼자 다녀왔는데요”
“조지아? 커피?”
아니. 거긴 미국 주고요. 아, 근데 커피는 그 조지아가 맞다.
내가 다녀온 조지아는 러시아 밑에 위치한 작은 나라다. ‘저렴이 스위스’라 불리는, 풍경은 기가 막히지만, 물가는 싼. 한국인들에겐 아직 낯선 나라. 여행지를 알아볼 여유조차 없어 친구가 다녀온 코스 그대로를 복+붙해서 가게 된 나의 2019년도 여름휴가였다.
앞뒤 주말 꽉꽉 붙여 쓴 9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공항으로 돌아가는 날(월요일 오후 1시에 인천 도착해서 곧장 2시 회의실로 쏜 날). 나는 공항이 있는 수도 트빌리시에서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시골 마을에서 마지막 교통편을 알아보고 있었다. 조지아는 ‘마슈로카’라는 미니밴이 여행객들의 주요 이동 수단인데, 흔히 3-4명이서 돈을 모아 함께 이동하곤 한다. 혼자 여행 간 난 하는 수 없이 그날도 캐리어를 세워두곤 수도로 이동하거나, 이왕이면 공항까지 갈 만국의 여행자들을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워낙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애매한 시간이었어서 그런지 비행기 시간이 다가와도 그날따라 정거장 근처에 아무도 보이질 않는 거라. 이러다간 비행기를 놓치겠다 싶어 결국 꾸준히 호객 행위하던 한 기사님에게 ‘에어포트, 원 펄슨. 에어포트!’를 외쳤다. 그 와중에도 차비를 한껏 후려친 나 자신에 뿌듯해하며.
조지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기사님도 매우 친절하셨다. 어디서 왔니, 왜 혼자 왔니, 몇 시 비행기니, 늦지 않을 테니 걱정말아라, 조지아 어디가 제일 좋았니 등등. 낯선 동양에서 온 여행자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보여주신 건 감사했지만, 이 죽일 놈의 낯가림. 심지어 영어 안 되는 두 외국인끼리의 영어 대화는 진입장벽이 꽤나 높았다.(그의 모국어는 러시아어, 심지어 나는 그보다 영어를 못했다). 미취학아동 수준의 단어 나열로 뭐라도 대답은 해드려야 한단 생각에 울퉁불퉁한 시골길만큼이나 마음은 불편했고, 이렇게 나란히 앉아 2시간 가까운 거리를 가야 한다니 막막함에 피로감이 밀려왔다.
‘이게 조지아 마지막 풍경인데. 제발 혼자 있고 싶다...조용히 음악 들으며 멍때리고 싶다... 날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하지만 기사님의 취조는 계속되었고, 자꾸 중간에 뭘 사고 싶으신 건지 지나는 길마다 가게를 들러 무언갈 묻고 다시 빈손으로 차에 타시곤 했다. 풀과 나무만 가득한 이런 시골길에, 간판도 없는 작은 구멍가게들엔 뭐가 잘 있으리란 법이 없다. 한 4번째인가 들른 가게에서 드디어 손에 물건을 쥐시곤 기다리게 해 미안하다며 다시 즐겁게 운전대를 잡으셨으니 또다시 토크 지옥.(와중에 절반도 못 알아들음). 꼬리뼈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다이나믹한 승차감에, 머리카락 쩍쩍 들러붙게 하는 뜨거운 공기까지. 하. 쉽지 않네. 멀미의 시작인가, 시차의 역습인가. ‘혼자 있고 싶다’ 속으로 백만 번 소리 지르며 겨우 눈에 힘을 주고 버티는 찰나에 훅 들어오는 기사님의 질문이 심장을 팼다.
“담배 좋아하니?” - 아뇨 아직 안 피는데요
“술 좋아하니?” - 아뇨 안 마셔요
“남자 친구는 있니?” - 아뇨 없는데요
...
“대체 넌 인생의 플레져가 뭐니?”
...
띠발?
한 대 맞은 기분이다. 이럴 땐 영어가 아주 그냥 쏙쏙 들리지.
그러게. 전 인생을 무슨 낙으로 사는 걸까요.
… 그렇다. 어쩌면 이 오랜 인류사의 즐거움은 저 세 가지로 축약되는지도 모르겠다. 술, 담배, 여자(혹은 남자)
저 쓰리콤보를 모두 안 하는, 아니 존재 자체에 흥미가 없는 난. 대체 무슨 낙으로 사는 걸까. 맨날 ‘행복은 어디있는거야아아아-’노래 노래를 부르면서, 정작 모든 인간들이 행복해지기 위해 하는 저 세 가지는 노오력도 안 해봤잖아. 그러면서 맨날 ‘인생이 재미가 없어어어어’, ‘행복하지 않아아아아’. 말로만 말로만.
누가 ‘삶이 무엇인가’하고 뻔한 질문을 던진다면, 난 망설임 없이 숙제라 답할 거다.
그저 꾸역꾸역. 해치워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숙제 지옥. 중학교 땐 외고 시험 준비, 고등학교 땐 대입 준비, 대학교 땐 취업 준비. 하기 싫지만 해치워야 하고, 끝나면 또 다음 거가 눈앞에 놓이는 끝도 없는 숙제. 그 라스트 팡이라고 달려온 취업 후엔 매일같이 그놈의 일.일.일. 이 숙제는 누가 내주는 건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숙제를 안 해가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숙제를 한다는 행위 그 자체, 엇나간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대전제가 주는 편안함이 곧 나였다. 이거 다 성격이다.
‘굳이’ 수업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어야 해? 어차피 점심시간엔 먹을 건데?
‘굳이’ 부모님 지갑에 손을 대야 해? 금방 걸릴 텐데?
‘굳이’ 술을 마셔야 해? (마셨다. 근데 맛이 없어서 더 후회했다 퉷)
사춘기 시절. 부모님 몰래, 선생님 몰래 남들 다 하는 짜릿한 그 사부작거림에서부터 도파민을 느끼지 못했던 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에이. 뭐 하러 일탈을 해. 제도권 안에서, 규율 안에서 나의 숙제를 빨리 해치우고 조금이라도 더 자는 게 훨씬 마음 편한데. 굳이…?
이게 다, 성격인 걸 어떡해.
그렇게 노잼으로 일관되게 살아오다, 서른이 한참 넘어 만난 이국땅 아저씨가 던진 돌 하나에 심장이 패인다.
“대체 넌 인생의 플레져가 뭐니?”
…
답을 할 수가 없다. 할 말이 없어서다. 아니다. 영어가 안 돼서다. 아니다. 둘 다다.
눈동자가 멍하니 창밖 허공에서 단어를 찾는다. 하지만 찾아질 단어는 어디에도 없다. 영어로도, 러시아어로도, 한국어로도. 플레져... 플레져? 내 자신이 한심해진다. 아니 뭐 어려운 걸 물어보길 했어, 답하기 곤란한 걸 물어보길 했어. 넌 무슨 낙으로 사냐는 3살짜리도 답할 수 있는 질문에 뇌 정지가 왔다. 아. 최지슬 뭐 하고 살았어 여태까지!!! 새벽에 퇴근하고 떡볶이 먹는 거라고 답할 수는 없잖아!!! 없어 보이잖아!!!
오랜만에 조용해진 차 안. 내가 답을 하지 않으니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그 뒤로 기사님이 추임새처럼 몇 마디 더 얹은 것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정적. 창밖엔 말도 안되는 아름다운 풍경이 계속해서 움직이는데, 차 안엔 어색한 고요만이 흐른다. 뭔가 그 분위기가 머쓱하셨는지 운전대를 잡고 있던 기사님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또다시 말을 붙인다.
“아직 공항까진 충분한 시간이 있는데, 너의 의사를 물어 보는거야. 너만 괜찮다면 혹시 … 차를 잠깐 세우고 나랑 섹스하지 않을래?”
귀를 의심했다. 영어 시간.. 엔 절대 들을 리 없었던, 영화에서나 들은 ‘그’ 단어를 내가 지금 들은 게 맞아? 이게 맞아?
“What?”(여행 와서 제일 훌륭한 억양과 발음)
“아니, 서로 즐거울 것 같아서. 나도, 너도”
이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 위를 달리는 움직이는 작은 점 하나. 옆에 앉은 이 외국인 남자가 운전을 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사람 한 마리 없는 이 대자연 속에서 달리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아니지. 오히려 차를 멈춘다면 그게 더 공포일지도 모른다. 키 작은 동양 여자가 이 시골길에 있었음을 본 이는 아무도 없고, 나는 이 남자에게 내 반대 의사를 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제대로 표현할 언어도 없다. 결국 나는 이 차 안에서 그에게도, 다른 이에게도 딱히 도움을 청할 방법이 없다.
‘아. 최지슬 이 험한 인생 끝이 결국 객사였구나. 그럼 미리 좀 알려주시지. 이럴 줄 알았음 더 사연 있어 보이게 마지막 편지라도 남기고 올 걸 그랬잖아요 하나님부처님신령님...ㅜㅜ’
평소 같았으면 이런 생각들로 두려움에 아마 사고가 정지했을 텐데...
그 순간. 내 뇌는 경로를 이탈하여 ‘흥미롭다’는 생각들로 가득 채워졌다.
본 지 몇 분 안 된 이 낯선 외국인 남자랑, 이 들판 한가운데서, 잔다고? 섹스를 한다고?
어차피 한국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었던 일이 된다. 우린 살아 있는동안 절대 다시는 볼 일 없는 사이다. 이 이야기는 지구 위 멀리 떨어진 두 점.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이다. 엇. 멋진데...?
심지어 외국인이랑은 한 번도 자본 적 없다. 흥미로운데? 아니 궁금한데? 한국에서의 원나잇보다 훨씬 죄책감도 적고 짜릿하며 한 여름밤의 꿈같은 몽환스러운 일.
심지어 내 의사를 물어오는 이 외국인 남자. 억양이나 태도나 눈빛이나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뭐랄까... 점잖은 ‘제안’이랄까. 다시 보니 꽤 큰 키에 잘생긴 것도 같고. 나쁘지 않을(?) 것도 같은데.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는 그 찰나의 순간. 가만 보니… 아까 4번이나 가게에 들러 결국 손에 쥐고 나오던 게, 어쩌면 콘돔이었나 싶다. 와아 뭐야. 내 착각인가. 나 지금 오버하는 건가. 아냐. 사이즈를 보나, 느낌적인 느낌을 보나. 너무 맞는 것 같은데. 어쩌면 내가 이 차를 탈 때부터, 계획적이었던 걸까. 아닌가. 순간 뇌 시냅스 연결 속도가 미친 듯이 폭발해서 오만가지 상상이 다 되는 건가. 근데 그게 진짜라면 상식과 예의(?), 기본 매너(!)는 있는 남자 아닌가? 뭐야. 개흥미로운데?
이건 일종의 ‘놀이’다. 그의 말 따라, “서로 즐거울 것 같아서” 합의 하에 하는 ‘플레져’.
일탈.
이것은 나름 내 인생 역대급 탑 순위에 오를 일탈이다.
누구 말 따라 막 심장 뛰고, 뇌를 빼놓고 본능대로 하고 싶고 뭐 그런 거.
“지슬PD는 일탈은 해본 적 있어?”
말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럴듯한 일탈기를 털어 ‘저 그렇게 꽉 막힌 노잼 아니에요’를 입증해 내야 한다.
말할까 말까.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 입술을 뗐다, 붙였다. 드디어 뗐다…
“에이. 전 타고난 성격 자체가 그런 걸 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해도 즐거운 것도 잘 몰라요.”
약간의 정적.
‘네가 그럼 그렇지’라는 짜게 식은 반응들. 그래 뭐, 괜찮다. 익숙하다.
덕분에 대화 주제는 빠르게 다른 작가님의 재미난 얘깃거리로 넘어간다.
어쩌겠는가. 일탈을 못 하는 것도, 설령 했을지언정 남한테 무용담(?)을 번지르르하게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것도. 다 내 성격인 걸 어떡해.
꽉 막히고 노잼인걸 알면서도 이런 나 스스로를 바꿀 의지조차 없는 하찮은 나 자신. 하지만 난 이런 빵 부스러기 같은 나를 부단히도 응원한다. 빵 부스러기가 모여 언젠간 그럴듯한 식빵이 될지도 모르잖아. 이런 나도 언젠간 개꿀잼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마흔 넘어 일탈에 눈을 떠 지랄 총량의 법칙을 다 채우고 죽을지도 모르잖아.
인생 모른다. 그러니 나라도 나를 응원해 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