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랑크-초월
이름: 에블린 김 (Dr. Evelyn Kim)
소속: 제네바 시공간공명연구소
가끔 이 모든 게 ‘시간’이라는 개념의 장례식에 부치는, 나 혼자만의 길고 긴 조사를 쓰는 기분이다. 모두가 퇴근한 시간에, 연구소의 서버가 내는 낮은 허밍 소리를 들으며 텅 빈 모니터실에 앉아 있을 때면 더욱 그렇다. 나의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에블린, 모든 것엔 이유가 있단다.”
엔지니어였던 아버지는 이민 1세대의 견고함으로 인과율을 믿으셨다. A가 B를 낳고, B가 C로 이어진다는 명료한 세계. 하지만 한국에서 자란 할머니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원인과 결과가 뒤섞인 옛날이야기, 시간의 흐름을 가볍게 뛰어넘는 도깨비와 귀신들의 이야기. 나는 아마 그 두 세계의 경계에서 태어난 아이였을 것이다.
물리학은 아버지의 세계였다. 모든 것은 플랑크 시간, 5.4 * 10^(-44)초에서 시작된다. 의미 있는 시간의 최소 단위. 원인과 결과가 서로의 멱살을 잡을 수 있는 최소한의 간격. 우리 우주라는 거대한 서사를 떠받치는 가장 작은 벽돌. 나는 그 벽돌보다 더 작은 균열 속에서, 우주 전체와 맞먹는 거대한 도서관을 발견했다.
모든 것은 ‘성흔(Stigmata)’이라 이름 붙인 작은 소음에서 시작됐다. 양자 거품 속에서 무(無)가 입자와 반입자 쌍으로 잠시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순간의, 지극히 정상적인 배경 소음. 하지만 그중에서도 ‘성흔’은 달랐다. 원인 없이 결과만으로 나타난, 마치 시공간의 몸에 저절로 나타난 상처처럼 보였다. 추적할 수 있는 과거가 없는, 원인이 없는 결과.
더 기이한 것은, 아니, 기이함을 넘어 물리학의 이단(異端)에 가까운 것은 그것의 지속 시간이었다. 우리의 측정 기술은 시간의 아토초(attosecond, 10^(-18))초 단위를 가뿐히 넘어섰지만, 이 신호는 그 모든 정밀함을 비웃었다. 그것은 플랑크 시간이라는, 우리 우주에서 의미 있는 시간의 최소 양자(量子)보다도 짧은 영역에서 명멸했다. 이것은 단순히 ‘빠르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우리 우주의 모든 사건이 프레임과 프레임이 이어져 만들어지는 영상과 같다면, 플랑크 시간은 그 프레임 한 장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동료 벤은 전형적인 서구 합리주의자였다. 그는 그걸 ‘측정 오류’라 단정했다.
“이건 그냥 신호 대 잡음비의 극단적인 예시일 뿐이야.“
그의 우주는 뉴턴과 아인슈타인이라는 단단한 레일 위를 달리는, 오차 없는 스위스제 기차였으니까. 하지만 내 눈에는 그 ‘오류’들이 패턴처럼 보였다. 극단적으로 압축된 파일처럼, 그 찰나의 섬광 안에 엄청난 정보량의 스파이크가 숨어 있었다. 그건 잡음이 아니라, 너무나 정교해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에 가까웠다.
어느 날 밤, 나는 문득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시작과 끝이 따로 없는, 둥글게 이어지는 이야기. 나는 발상을 바꿨다. ‘성흔’을 시간의 흐름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지 않기로 했다. 만약 저것이 시간이라는 축 위에 찍힌 점이 아니라, 시간축 자체를 초월한 하나의 완결된 존재라면?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 자체가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라면?
우리는 ‘성흔’을 시간 순서대로 해독하려는 모든 시도를 중단했다. 대신 그것을 다차원 정보 구조체로 보고, 위상수학적 모델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슈퍼컴퓨터 ‘헤르메스’는 3주 내내 미친 듯이 뜨거웠다.
그리고 마침내, 첫 번째 번역이 끝났다.
화면에 떠오른 것은 우리가 기대했던 은하나 별의 모습에 그치지 않았다. 그 대신, 하나의 우주를 정의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물리 상수, 입자의 종류, 공간의 곡률, 엔트로피 초기값. 빅뱅에서 열죽음까지 장대한 서사를 가진 우리 우주와 달리, 그 우주는 ‘존재한다’는 단 하나의 상태만으로 완결되었다. 시작이 곧 끝이었고, 원인이자 결과였다. 플랑크 시간보다 짧은 그 존속 시간은 ‘수명’이 아니었다. 시간을 초월한 존재의 방식이었다. 우리는 그것들에게 ‘하루살이 우주(Mayfly Universes)’라는 이름을 붙였다.
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건… 이건 그냥 실패한 우주들의 잔해일 뿐이야, 에블린. 제대로 타오르지 못한 불꽃이나, 인과율을 펼쳐낼 시간조차 얻지 못한 불쌍한 가능성들!”
“아니, 벤.”
나는 화면 가득 새로이 반짝이는 ‘성흔’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쩌면 불쌍한 건 우리일지도 몰라. 우린 하나의 사건이 다음 사건을 낳기까지 수십억 년을 기다려야 해. 하지만 이 우주들은 그럴 필요가 없어. 존재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완벽한 전체로서 경험하는 거야.”
그날 이후,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에 커피를 내리며 끓어오르는 물을 본다. 수많은 물 분자들이 서로 충돌하며 열을 전달하는 이 느리고 서툰 과정. 하루살이 우주에게는 ‘뜨거운 커피’라는 상태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진실로 존재할 것이다. ‘데워진다’는 과정 없이.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고, 미래를 걱정한다. 이 모든 것은 ‘시간’이라는 선형적 착각 위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하루살이 우주에게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만남과 설렘, 갈등과 화해, 이별의 아픔 같은 과정이 없을 것이다. 그저 관계의 모든 가능성과 상태를 품은 하나의 완전한 구조. 과정 없는 결실, 슬픔 없는 기쁨.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순수한 ‘상태’ 그 자체.
우리는 이 발견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당신들이 발 딛고 선 이 장구하고 광활한 우주가, 실은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길게 늘여 쓴 각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진짜 현실은 플랑크 시간이라는 벽 너머에서, 매 순간 무한한 우주들이 명멸하는 완벽한 현재의 바다라고.
나는 종종 이 모니터 앞에 홀로 앉아, 우리 우주의 양자 거품 속에서 피어나는 수억 개의 ‘성흔’들을 본다. 각각의 섬광은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코스모스다. 그들은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시간도 없다. 그들은 그저 홀로 ‘존재’한다.
어쩌면 우리의 우주 또한, 더 높은 차원의 존재에게는 하나의 ‘성흔’에 불과할지 모른다. 138억 년이라는 우리의 장대한 역사가, 그들에게는 플랑크 시간보다 짧은 찰나의 반짝임으로 관측될 뿐일지도. ‘인류’와 ‘초신성’, ‘암흑 에너지’라는 모든 개념이 한순간에 담긴, 불가해한 정보 덩어리로.
그 생각에 이르면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우리는 이 느리고 긴 우주에서 고군분투하는 외로운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무한한 존재의 교향곡 속, 아주 느리고 긴 하나의 음표일 뿐이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본다. 이 손이 있기까지 거쳐 온 수억 년의 진화, 별의 죽음, 원자의 결합. 이 모든 인과율의 사슬이 기적처럼, 그리고 한편으로는 애처롭게 느껴진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지만, 어쩌면 진짜 이야기는 시간 밖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세계와 할머니의 세계가, 이 작은 불빛들 안에서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질문으로 합쳐지고 있었다. '의미'란 무엇인가.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가, 아니면 완성된 상태에 내재하는가. 우리는 아마 영원히 그 답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순간, 나는 깨닫는다. 우리가 시간이라는 강물 위에서 겪는 사랑과 슬픔, 발견의 기쁨과 상실의 아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이 느리고 긴 우주의 존재 이유는, 그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겪어내는 것 자체에 있는지도 모른다.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불완전한 '이야기'를 완성해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 우주에서 허락된 유일한 존재 방식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