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단편 - 꼭 자연산 행복만 고집할 필요 있을까?

꼭 자연산 행복만 고집할 필요 있을까? 양식 행복을 구매하면 되지 않을까

by ToB

김 대리의 감정 계좌는 잔고 부족 경고등을 켠 지 오래였다.


"김 대리! 지금 이걸 보고서라고 가져온 건가? 데이터의 인사이트가 없잖아, 인사이트가! AI가 분석한 로우 데이터를 그냥 복사-붙여넣기 할 거면 자네가 왜 필요하지? 그럴거면 김 대리 대신에 그냥 컴퓨터 한대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자네 월급은 일을 하라고 주는 돈이야! 정신차려!"


박 부장의 메마른 목소리가 회의실의 공기를 얼렸다. 회사의 수많은 요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에너지는 이미 소진되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업무와 압박 속에서 김 대리의 감정 회로는 과부하로 타 들어가고 있었다.


회의실을 나온 그는 거대한 기계의 멈춰버린 톱니바퀴가 된 기분이었다.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연료 주입이 필요했다. 축축한 인공 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며 그는 결심했다. 오늘은 정기적으로 구매하던 '업무용 평온함' 외에 다른 걸 좀 사봐야겠다고.


퇴근길, 그는 홀로그램 광고판에 떠 있는 한 문장을 무심코 읽었다.

'오래된 영화 속, 그들이 진짜로 느꼈던 행복의 비밀!'

광고는 복고풍 감성을 자극하는 '헤리티지 이모션' 브랜드의 신제품이었다. 김 대리는 코웃음을 쳤다. 비밀은 무슨. 비효율과 고통 속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불안정한 화학작용일 뿐이지. 그에게 행복은 비밀이나 신비가 아니라, 성분표가 명확한 공산품이었다.

그는 가장 확실하고 효율적인 감정 공급처, '필-굿 마트(Feel-Good Mart)'로 향했다.


'24시간 연중무휴, 신선한 감정 배달'.


간판의 푸른빛이 그의 텅 빈 얼굴을 비췄다.


"삐빅- 환영합니다, 고객님. 고객님의 감정 상태를 스캔하여 최적의 상품을 추천해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김 대리는 기계의 과잉 친절을 거절하고 카트를 밀었다. 거대한 마트 내부는 말 그대로 감정의 백화점이었다.


'데일리 이모션' 코너에는 '월요병 극복용 의욕(에너지 드링크형)', '지루한 회의를 견디는 인내심(구강청결 필름형)' 같은 실용적인 상품들이 있었다. '가정의 평화' 코너에는 '아내의 잔소리를 흘려듣는 평온함'과 '사춘기 자녀를 이해하는 인자함'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모두 그에게 익숙한 상품들이었다.


그는 곧장 신선 코너로 향했다. 투명한 냉장 진열대 안에는 'A++ 등급 양식(養殖) 행복'이 부위별로 포장되어 있었다. 최상급인 '자녀의 명문대 합격의 환희(농축액)'는 그가 6개월치 월급을 모아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그에게 저것은 더 나은 '느낌'이라기보다는 더 높은 '신분'의 상징이었다. 최고급 승용차나 명품 시계처럼, 소비하는 감정의 등급이 그 사람의 계급을 증명하는 시대였다.


그의 눈길은 할인 상품이 모여 있는 매대 끝으로 향했다.


"오늘의 특가! '소소한 안정감' 통조림 1+1 행사! 유통기한 임박!"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명랑한 목소리. 그래,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계급을 상승시킬 환희가 아니었다. 단지 이 시스템에서 탈락하지 않고 내일을 버티게 해 줄 최소한의 안정감. 그거면 충분했다. 그는 마치 무나 양파를 고르듯, 캔 두 개를 집어 꼼꼼히 살폈다.


'제조사: (주)뉴로-푸드. 성분: 합성 옥시토신 15%,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30%, 감정 안정화 분자 55%. 부작용: 과다 섭취 시 가벼운 무력감이나 현실감 저하를 유발할 수 있음.'


늘 보던 안전한 성분표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통조림 두 개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계산대 직원의 얼굴은 완벽하게 무표정했다. 아마도 회사에서 제공하는 '업무용 평온함'을 정기적으로 주입 받는 모양이었다.

"해피-포인트 적립하시겠어요?"

"아니요."

그때, 계산대 옆에 있는 '프리미엄 라운지'에서 한 가족이 상담을 받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감정 컨설턴트'가 아이에게 말했다.


"우주야, 이번 생일에는 어떤 기분을 선물 받고 싶니? 하늘을 나는 듯한 자유로움? 아니면 친구들에게 인기 만점이 되는 자신감?"


아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진열된 '강아지와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을 가리켰다. 김 대리는 무표정하게 그들을 지나쳤다. 저 아이도 자신처럼, 평생 감정의 소비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김 대리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넥타이를 풀며 '소소한 안정감' 통조림을 땄다. 칙- 하는 소리와 함께 무색무취의 기체가 피어올랐다. 그는 익숙하게 캔에 코를 박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들이쉬고, 참고, 내쉬고. 감정 주입의 기본 절차였다.


순간, 뇌의 편도체를 자극하던 스트레스 신호가 차단되는 느낌이 들었다. 박 부장의 목소리는 의미 없는 소음으로 변환되었고, 복잡했던 프로젝트 계획서는 그저 문자의 나열로 보였다. 심장을 옥죄던 불안감이 증발하고, 그 자리를 깨끗하고 텅 빈 평온이 채웠다. 이것이 그가 아는 '안정'의 전부였다. 속이 든든해지는 충만함이 아니라, 텅 비어 오히려 가벼워지는 감각.


그는 무감각한 평온 속에서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하고, TV를 켰다. 마침 시사 프로그램에서 '정서 양극화 사회'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었다.


"최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행복 밀렵꾼'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낭만주의자들일 뿐입니다!"


화면에 나온 유명 '감정 사회학자' 최 박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검증되지 않은 자연산 행복은 통제 불가능한 부작용을 낳습니다. 과도한 성취감은 오만으로, 순수한 기쁨은 현실 도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정부가 보증하고 기업이 생산하는 '양식 행복'이야말로 모든 국민에게 평등한 감정 복지를 제공하는 위대한 발명입니다. 감정적 안정망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앵커가 말을 받았다.


"네, 오늘 새벽에도 강원도 산간 지역에서 명상, 하이킹 등의 불법적인 방법으로 '자연산 행복'을 채취하려던 일당이 체포되었습니다. 화면 함께 보시죠."


화면에는 마스크를 쓴 채 경찰에 연행되는 사람들이 비쳤다. 김 대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퇴근길 광고에서 본 '행복의 비밀'을 찾겠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왜 저렇게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방식으로 감정을 얻으려 하는 걸까.


바로 그때였다. 연행되던 한 여자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카메라를 보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그것은 김 대리가 아는 '웃음'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양식 웃음'의 제품 설명서에는 '안면 근육의 대칭적 수축'과 '예측 가능한 엔도르핀 분비 곡선' 같은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저 아이의 웃음은 비대칭적이었고, 불규칙했으며, 그 어떤 데이터로도 분석할 수 없는 혼돈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짧은 순간이 김 대리의 뇌리에 박혔다. 통조림이 만들어준 '안정감'의 막을 뚫고 들어온 날카로운 파편처럼.


프로그램은 끝났지만, 아이의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은 김 대리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는 식탁 위에 놓인 나머지 '소소한 안정감' 통조림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1+1으로 얻은 공짜 안정감. 내일 아침 출근 전에 흡입하면 끔찍한 월요일도 무사히, 그리고 무감각하게 넘길 수 있을 터였다.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저 뉴스 속의 아이처럼, 저렇게 비효율적이고 거칠고 통제되지 않는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 성분표도 없고, 유통기한도 없고, 부작용도 예측할 수 없는 저것은.


'양식 안정감'의 약효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공허함이 밀려왔지만, 오늘은 그 공허함의 결이 조금 달랐다. 무언가로 채워져 있다가 비워진 공허함이 아니라, 태초부터 아무것도 없었음을 깨달아버린 절대적인 공허함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맞은편 아파트의 한 창문 너머로 한 가족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아빠와 아이가 장난을 치고, 엄마가 웃으며 무언가 소리치는 모습.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살아있었다. 완벽하게 조율되지 않은, 조금은 소란스럽고 어수선한 풍경.


김 대리는 평생 처음으로, 자신이 아는 세상의 바깥을 상상했다.


"저것이… 그 광고에서 말하던 '비밀'이라는 걸까?"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을 상상하려는 듯, 그는 필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대답 없는 질문은 차가운 유리창에 부딪혀 흩어졌다. 식탁 위의 통조림은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 그는 과연 저 익숙하고 안전한 캔을 따게 될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불안정한 비밀을 찾아 나서는 첫 질문을 품게 될까.


도시의 밤은 깊어갔고, 수많은 '필-굿 마트'의 간판들은 잠들지 않는 도시인들을 위해 밤새도록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