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좋아
기계를 좋아하던 나는 원래 기계공학과를 가고 싶었지만 그 시절 기계공학과 입시점수가 높아 유사한 전기공학과로 입학을 했다. 4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성적은 좋지 않았다.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불구하고 말이다. 원인을 생각해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전자의 이동, 전압, 반도체 등)을 공부하고 이해하려는 게 나하고는 맞지 않았던 거 같다. 아무튼 평범하게 학점 3.29/4.5라는 점수를 갖고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졸업했다.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건 결국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나오는 말 같다. 나는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다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기에... 그리고 대외활동이나 동아리 같은 대학생 때만 할 수 있는 활동을 하나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졸업하자마자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호주에서 1년을 꽉 채워 놀았고 운이 좋게 코로나가 막 시작하기 이전(3월)에 돌아왔다. 사실 귀국날 아이패드랑 여권을 도난당해 돌아오기 마지막 여행지였던 뉴질랜드 로드트립은 못 간 아쉬움은 있었지만 어쨌든 한국으로는 무사히 돌아왔다.
호주 가기 전 가장 큰 고민은 취직하기에 늦은 나이가 되지 않을까였다. 빠른 친구들은 이미 취직을 했거나 취직 준비 중이었거나였는데 나는 휴학을 해 이미 늦은 상태에 1년을 더 늦게 취준 한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나도 그게 엄청난 일인 마냥 걱정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운이 좋았는지 돌아온 후 2개월 만에 6개월짜리 체험형 인턴을 하고 이어서 다른 회사에 정규직으로 채용이 되었다. 규모로 보면 연 5000억 매출을 올리고 있는 중견기업이었다. 그 회사에서 첫 3개월 동안은 인턴으로 있다가 정규직으로 채용되었는데 정규직 전환하는 날에 회사 점퍼 및 굿즈를 나눠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부터 나는 회사를 다니기 싫어했던 거 같다. 모두 같은 옷을 받아 입으며 좋아하는 동안 나한텐 죄수복 같았다. 낮은 천장, 틀에 갇힌 사무실, 9-6로 출퇴근하는 시간 제약... 제 발로 지옥에 들어온 멍청이가 된 느낌이었다.
회사 생활 역시 녹록지 않았다. 8시 30분까지 출근하려면 6시 30분에 일어나 준비했고 6시에 퇴근하는 날은 손에 꼽았으며 주로 10시 정도였다. 대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뿐 아니라 적용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었다. 상사들이 말하는 얘기는 정말 외계어 같고 이해가 하나도 안 됐다. 그리고 회사 있는 시간 대부분 필요한 볼트와 너트 찾으러 다녔고 어떤 날은 그 작은 곳에서 이만보를 걸은 적도 있었다. 진짜 매일같이 현타 오는 날이었다. 불행 중 다행히 같이 일하는 동료와 선배들은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다만 좋고 잘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하나 둘 좋은 곳으로 이직했다. 처음 내 위로 8명 정도 있었는데 2년 차정도 되었을 땐 1명 남았다. 그리고 내 밑으로만 3명이 더 생겼다. 누군가는 막내에서 벗어나서 좋겠네라고 하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신입을 가르친다는 게 더 힘들었다. 나도 빨리 이직해야겠단 생각만 가득 들었다. 아니 사실 그냥 퇴사하고 싶단 생각이 맞다.
그렇게 1년을 더 버텼고 운이 따라줘서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다만 이번엔 정규직이 아니라 파견직이었다. 파견직이라는 게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하고 4대 보험, 퇴직금, 성과급 등 없는 불안정한 상태이지만 큰 좋은 점들이 있었다. 우선, 연봉이 전 직장에 비해 1000만 원 이상 높아졌다. 그리고 높은 네임밸류를 갖은 회사였기에 발판 삼아 1년만 다니고 이직할 생각이었다. 또한, 파견직이었기 때문에 야근 강요는 없었다. 입사하기 전 계획은 이랬다. 야근을 하지 않을 테니 6개월 동안 회사 외 부수입을 만들자. 부수입 만들기에 성공한다면 부수입의 크기를 점차 늘려나가다가 회사 수입 이상이 되면 퇴사를 한다. 만약 부수입을 만들지 못한다면 이직준비를 하자. MBTI가 P인 나의 완벽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제부터 틀려버렸다. 여기도 역시 야근 지옥이었다. 똑같이 6시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원래 6시 퇴근이지만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보통 11시가 넘었었다. 사실 파견직이라 야근을 안 해도 되는 게 맞지만 같이 일하는 팀원들이 아는 사람들이었고 정말 좋고 나를 위해 배려도 많이 해줬던 사람들이라 이 사람들이 야근을 하면 나도 도와준답시고 야근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스스로 지옥에 빠진 꼴이었다. 어떤 미친 파견직이 회사에서 13시간씩 일을 할까 싶다...
나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렇지만 팀의 성과는 좋지 않았다. 회사는 어쩔 수 없이 인풋 대비 아웃풋이 중요하고 성과로 말을 해야 했다. 내가 있던 팀은 전기차 완속충전기 선행개발팀이었는데 전기차 시장 침체와 전기차 화재로 인한 캐즘, 거기에 회사 내부 경영 악화까지 겹치면서 구조조정 대상이 되었고 갑작스럽게 해체가 되었다. 2024년 8월 초에 통보를 받았고 9월부로 난 회사에서 잘렸다. 입사를 2월에 했는데 1년도 지나지 않은 9월에 잘렸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땐 너무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었다. 뭐 작은 중소기업도 아니고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어봐도 아는 정도의 이름을 가진 중견인데 이렇게 잘리다니... 더 어이가 없었던 건 나의 계약이다. 내가 일한 회사를 A회사, 아웃소싱회사는 B회사로 정의하고 얘기해 보자. 나는 B회사(아웃소싱회사)와 1년 단위 계약을 했는데 전임자에 이어받아서 일을 하다 6월에 재계약을 했다. 그런데 그 계약은 나와 B의 계약이고 B와 A회사(내가 일한 회사)는 따로 계약 따윈 없었던 것이다. 원래라면 정식으로 A와 B 사이에 계약서를 작성하고 내가 A회사에서 일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구두계약정도로 해서 A회사의 재료비 중 일부를 B에게 주며 나를 A회사에서 일하게 했던 것이었다. 내 입장에선 B회사에 계약 관련 문제 제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도 개인 입장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스트레스받아가며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냥 해고를 순응하게 되었다.
앞으로 마약 같았던 월급이 끊긴다는 생각에 속 마음은 정말 욕 밖에 안 나왔다. 카페에서 혼자 앉아서 표정은 멍 때리고 속으론 욕하다가 갑자기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 나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직 준비를 해야 하나? 아니면 잠깐 쿠팡 같은 단기 알바라도 해야 하나? 집 월세 어떻게 감당하지? 여자친구한텐 뭐라고 말해야 하지? 부모님한텐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하...'. 그러다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걱정이 갑자기 싹 사라졌다. '아. 그래. 원래 난 회사 다니기 싫어했고 힘들었잖아. 그리고 마음 한편에 내 사업하고 싶다는 생각 많았잖아. 어차피 실업급여 나오니까 그 기간 안에 브랜드 런칭 하나 해보자. 그리고 실패하면 다시 이직 준비해서 회사 다니자. 지금 하늘이 나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무대 만들어준 거네. 이렇게 된 거 오히려 좋다. 내 거 한번 해보자!'. 갑자기 희망회로가 켜지면서 혼란, 걱정, 근심 같은 부정적인 생각들이 싹 사라졌다. 나는 안다. 이런 마음이 충동적으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첫 회사에 입사하면서부터 단 한 번도 개인 사업에 대해서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없다. 그리고 이 기회는 정말 인생에서 몇 번 오지 않는 기회라고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안다. 아직 나는 준비가 안되었다는 걸. 여러 가지 사업 아이템을 생각하며 살아오긴 했지만 뚜렷하게 구체화해본 게 없고 그냥 사회적으로 능력치도 많이 부족하다. 마냥 행복회로만 돌리는 게 아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이게 될까? 안되면 어떡하지? 아니야. 이거 무조건 된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여기저기에 판로 뚫으면 가능성 충분히 있다.' 이렇게 자신감이 완전 바닥이 되었다가 다시 쭉 올라왔다 한다. 내 인생에 이런 감정기복은 처음이다. 이런저런 생각 많이 하면서 결론 낸 건 '일단 그냥 하자'이다. 할 일이 엄청 많아 걱정만 하면 뭐 하나.. 할 일이 없어 걱정만 하면 뭐 하나.. 결국 내가 뭔가 해야 할 일이 줄어들던지 뭐라도 할 일이 생기던지 하니깐 말이다. 아직 나는 많이 부족하지만 혼자 머릿속에 구상해 본 많은 것들을 구체화하며 성장하고 헤쳐 나갈 것이다.
앞으로 여기에 사업 진행 과정,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슈들, 그리고 나의 감정과 느낀점들을 기록해 나갈 예정이다. 부족한 글 솜씨와 잘 읽히지 않는 스토리텔링이지만 꾸준히 공부하며 재밌게 풀어내도록 노력해보겠다. 무언가 방황을 겪고 노력을 하는 사람들(나 포함) 모두 힘을 내길 바란다. 화이팅.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 Fau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