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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애 Mar 16. 2024

부질없는 미련

마지막 단감

부질없는 미련/김미애

추석을 즈음하여 점방 앞에 쌓아놓은 과일 상자 안의 먹음직스런 단감을 보니, 만두집을 했던 해의 늦가을 기억 한 토막이 생각난다.


친정엄마가 만두집 앞에 내놓고 팔아보라며 단감을 따서 네 자루의 정부미 포대에 담아 1시간 40여 분의 거리를 시외버스로 올라오신다는 전화를 받고 남편이 진월동으로 마중 나갔다. 

딸아이를 4살 때까지 키워 주신 정이 커서인지 친정엄마를 무척 따르는 외손녀딸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려 핑계 삼아 올라오셨을 텐데, 우리 집에는 오시지 않고 마중을 나간 사위 편에 감 포대만 전해 주고 도로 내려가셨다. 내가 종일 가게에 있는 터라 우리 집에 오셔도 변변한 식사 한 끼 대접해드리지 못하니 한번 올라오시란 말도 못하는 형편이다. 막상 도로 내려 가셨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내내 편치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 집에 와 계시는 시어머니가 무척 어려우셨던 듯했다.  


단감이 든 포대를 차 트렁크에서 꺼내어 가게 앞에 늘어놓고 보니, 친정엄마 혼자 그 많은 감을 어찌 따셨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분량이었다. 

30여 년 동안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정들었던 친정집이 소방도로 공사로 인해 완전히 헐리게 되는 바람에 텃밭의 감나무에서 마지막으로 수확한 단감이다. 행여 허투루 다루어 못 먹게 될까 봐 상품성이 있는 단감과 얼른 먹어야 할 단감을 고르는 작업부터 했다. 


단감이 아주 잘 익어서 꿀맛이긴 했지만 군데군데 홍시가 되어가려고 준비 중인 것도 있고, 장대로 휘두를 때 바닥에 떨어졌는지 멍이 들거나 금이 간 것도 있었다. 

감 포대와는 별도로 가져 오신 검정 비닐봉지에 들어 있던 감은 추석 차례 지내느라 설익은 감을 땄던 것을 안 드시고 냉장고에 넣어 두셨나 보다. 억지로 홍시가 되긴 했어도 맛이 덜 했다. 그 봉지의 감은 상품성이 전혀 없어 가게 문턱을 넘어서지도 못하고 딸아이 편에 들려 집으로 보냈다.

 "외할머니께서 일부러 가져다주신 것이니 썩히지 말고 부지런히 먹어라."하며 신신당부를 했다.  딸아이 역시 외할머니가 주신 것이라고 하면 신경 써서 먹는 편이기에 '일부러 주신 것'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농약을 한 번도 하지 않아 완전히 무공해 감이다. 물에 씻거나 껍질 벗기는 과정조차 생략하고 감을 바지에다 쓱쓱 문질러 틈나는 대로 그냥 베어 먹었다. 그런데 먹기 좋은 탱탱한 감을 먼저 야금야금 먹고 있다 보니 만두찜기들을 넣어 두는 대형 냉장고에 임시로 넣어 두었던, 아주 잘 익어 홍시가 되려는 감들은 쪄 놓은 만두를 찜기 채 넣어 둘 공간이 부족하여 냉장고에서 바깥으로 밀려났다. 


냉장고에 있으면 감이 덜 물러질 텐데 상온에다 놓아두니 점점 더 물렁물렁해져 가고 있는 데다, 가게도 좁은데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고 여기는 남편이 어느 날 주섬주섬 검정 비닐봉지에 담았다. 물러진 감을 그렇게 차곡차곡 봉지에 담아두면 짓이겨져서 먹기가 더 성가시고, 더 물러지면 감식초가 될 텐데 왜 봉지에 넣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까우니까 병원에 가지고 가서 먹으려고 그런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성격상 병원에 가지고 가서 먹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병원 옆의 중고 가전제품 가게의 조 씨한테 모조리 갖다 줄 심산이란 건 안 봐도 뻔하다.

시어머니 역시 워낙 남 주기 좋아하시는 분이다. 제주도 시누 집에 다녀오셨을 때 시누가 사 준 한라봉 한 상자를 가져 오셨을 때에도 좋은 걸로 골라 이웃집에 두루 나눠 주시고, 우리 가족은 흠이 나 있는 두어 개의 한라봉을 몇 조각 나눠 그야말로 맛만 본 것이 전부였다. 


시골에서 채소들을 가져 왔을 때도 언제 다 먹느냐며 애를 태우시는 시어머니가 이 집 저 집 다 나눠주고 우리는 처진 부스러기만 먹곤 했다. 감 역시 집에 많이 갖다 놔두면 남 좋은 일 시키는 것이 될까 봐 안전하게 가게에 놔뒀더니 이젠 남편이 "좁은 가게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도 짐이여."라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퍼 주기 바빴다.


물론 주위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끌어안고 있으면서 다 먹지도 못하고 결국은 썩어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남 주기 아까울 때가 있다. 친정엄마가 당신 드시는 것도 아까워 딸네 집에 보내온 단감이 특히 그렇다.   

더욱이 얼마 안 있으면 집이 뜯기게 되니 친정집 감을 맛볼 수 있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란 생각에 아쉬움이 미련으로 남았다. 


그렇다고 항상 욕심 주머니 하나 더 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주고 싶은 사람한테는 간혹 퍼 주기도 하는데 이상하게 주는 것 없이 미운털 박힌 사람이 꼭 있다. 얌체 같은 조 씨가 딱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남편이 조 씨 가게에 가서 차를 마시기도 했고, 허리가 아프다고 했을 때 교정도 해 주고, 조 씨네 가게에 필요하다 싶은 물건이 있으면 막 퍼다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막상 만둣집에 필요한 정수기랑 선풍기 및 기타 집기류 등을 부탁했을 때는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주문한 집기류를 가게에 가져다줄 때마다 혼자 온 적이 거의 없었다. 

온 가족이 나들이 삼아 우르르 몰려와 만두랑 닭꼬치 등을 실컷 먹은 다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제 가게인 것 마냥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고, 집에 갈 때도 기어이 하나씩 입에 물고 만두도 바리바리 싸 들고 갔다. 

물론 바리바리 싸 준 사람은 남편이다. 설사 내가 다 못 먹고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조 씨한테 주기는 싫었다. 그런데 이제 더는 맛 볼 수 없는 친정에서 온 마지막 단감들이 무더기로 봉지에 담겨져 남편의 차 트렁크 속으로 들어갔다.


단감을 좋아하는 딸아이는 별로 달지도 않고 처진 것을 먹었던 흔적이 식탁 위에 껍질로 남아 있고, 남편의 차 트렁크 속으로 들어간 저 단감들이 이 밤만 지나면 미운털 같은 조 씨한테 줘 버릴 거란 생각이 들자 단감에 대한 미련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대로 손 놓고 가만히 있으면 도저히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 남편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후 남편 바지 호주머니에서 차 열쇠를 훔쳐 범행(?)을 저질렀다.

딸 아이 먹으라고 놔뒀던, 베란다에 놓여있는 처진 감 중에 여덟 개를 골라 남편의 차 트렁크에 있는 감 중에서 맛있어 보이는 것으로 바꿔치기를 한 것이다. 그러고도 아까운 생각이 들어 몇 개 더 집어내었다.

그제서야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물론 눈치가 100단인 남편이 차 트렁크를 열었을 때 감 봉지가 현저하게 줄어든 것을 눈치를 채지 못할 리가 없다.

여지없이 밴댕이 속을 훤히 드러내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친정 단감을 더는 못 먹게 된 원망이 남편한테로 고스란히 가게 될 것 같아 차라리 남편의 노여움을 감수하고 범행을 저지른 편을 택했다. 그것에 대해 미안해하거나 후회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혼자만의 비밀이었던 것을 기록으로 남겨 완전범죄가 되지 못함이 심히 껄끄럽긴 하다.

대부분 완전범죄가 되지 않고 결국 덜미가 잡히고 마는 사건들을 보면 범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미련스럽게 세밀하게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점 때문이다.

나의 평소의 신조가 '실수도 기록하는 메모광이 되자'일 정도로 기록하는 습관은 권장할 만한 일이지만 가끔은 발목을 잡히고 제 발등을 찍을 때가 있다.


아무리 마지막으로 수확한 친정 단감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고는 하나, 남편 몰래 야밤에 차 트렁크를 열고 감을 바꿔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진짜 범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어떻게 맘 편히 잠을 잘 수 있는지 대단한 강심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몇 해가 지난 지금, 블로그에 기록해두었던 글을 브런치북에공개하고 말았으니 이로써 완전범죄가 되지는 못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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