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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애 Mar 16. 2024

부질없는 미련

마지막 단감

부질없는 미련/김미애

옆집 담장 너머로 노랗게 익어 손을 뻗으면 곧 닿을 듯 주렁주렁 매달린 단감을 보자 십수 년 전 어느 가을이 생각난다.

  친정엄마가 가게 앞에 내놓고 팔아보라며 단감 네 포대를 따다 주셨다. 30년 동안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정들었던 친정집이 소방도로 공사로 인해 완전히 헐리게 되는 바람에 텃밭의 감나무에서 마지막으로 수확한 단감이다. 엄마가 혼자 그 많은 감을 어찌 따셨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분량이었다. 겉에 흠이 없이 매끈한 단감은 팔고, 군데군데 홍시가 되어가거나 장대로 휘두를 때 바닥에 떨어졌는지 멍이 들거나 금이 간 감은 따로 놔두고 먹었다. 농약을 한 번도 하지 않아 완전히 무공해 감이라 물에 씻거나 껍질 벗기는 과정조차 생략하고 바지에다 쓱쓱 문질러서 그냥 베어 먹었다. 단감이 아주 잘 익어서 꿀맛이라 한 번에 두세 개씩 먹어도 감이 물러지기 전에 다 먹기엔 많은 양이었다.  어느 날 남편이 감을 검정 비닐봉지에 주섬주섬 담았다. 

 “좁은 가게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도 짐이여.”

분명 중고 가전제품 가게의 조 씨한테 갖다줄 거란 건 안 봐도 뻔했다.

주위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내가 주고 싶은 사람한테는 간혹 퍼 주기도 하는데 정말 남 주기 아까울 때가 있다. 얌체 같은 조 씨가 딱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남편이 조 씨네 가게에 필요하다 싶은 물건이 있으면 갖다주고 물리치료도 해주며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막상 우리 만둣집에 필요한 정수기랑 선풍기 및 기타 집기류 등을 부탁했을 때는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주문한 집기류를 가게에 가져다줄 때마다 가족 동반이었다. 만두랑 닭꼬치를 공짜로 실컷 먹은 다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제 가게인 것처럼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고, 집에 갈 때도 기어이 하나씩 입에 물고 만두도 바리바리 싸 들고 갔다. 물론 ‘바리바리’ 싸 준 사람은 남편이다. 

내가 감을 다 못 먹고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조 씨한테 주기는 싫었다. 친정엄마가 보내온 그해 단감이 특히 그랬다. 얼마 안 있으면 집이 뜯기게 되기에 친정집 감을 맛볼 수 있는 마지막 단감이란 생각에 아쉬움이 미련으로 남았다. 그런데 이제 더는 맛볼 수 없는, 친정에서 온 마지막 단감들이 무더기로 봉지에 담겨 남편의 차 트렁크 속으로 들어갔다. 그 단감들이 이 밤만 지나면 미운털 같은 조 씨한테 줘 버릴 거란 생각이 들어 단감에 대한 미련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날 밤, 그대로 손 놓고 가만히 있으면 도저히 마음이 편치 않아 뒤척이다가 남편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후 옷걸이에 걸어둔 남편 바지 호주머니에서 차 열쇠를 훔쳐 범행(?)을 저질렀다.

베란다에 놔둔 물러진 감 여덟 개를 남편의 차 트렁크에 있는 감 중에서 맛있어 보이는 것으로 바꿔치기했다. 그러고도 아까운 생각이 들어 몇 개 더 집어내었다. 그제야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남편이 차 트렁크를 열었을 때 감 봉지가 현저하게 줄어든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별말 없이 무사히 잘 넘어갔다.
 평소의 신조가 ‘실수도 기록하는 메모광이 되자’이긴 하지만 더러 완전범죄가 되지 않고 덜미가 잡히고 마는 사건들을 보면 범행 일지를 세밀하게 기록하여 제 발등을 찍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마지막으로 수확한 친정 단감에 대한 미련 때문에 저지른 행동을 기록으로 남겼으니, 대나무 숲에다 대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외치고 만 셈이라 완전범죄가 되지 못함이 심히 껄끄럽다. 하지만 그날 밤 저지른 내 행동이 여지없이 밴댕이 속을 훤히 드러내 보이고 부질없는 미련이었을지라도 그것에 대해 미안해하거나 후회하지는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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