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스웨덴에서 혼자 뛰는 러너 이야기 #2.

우리집 김부장 이야기

by Chacha
2025년 12월 14일


며칠째 하루종일 비가 내리고 있다.

눈이 와야 할 날씨에 지구가 정말 아픈건지 눈은 커녕 비만 흩뿌린다.

질퍽 거리는 물 구덩이는 정말이지 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오늘은 실내 달리기를 택했다.

다행히 나는 기계 위에서 달려도 즐겁다.

도파민도 팡팡 잘 나온다.

슬금슬금 올라가는 숫자도 기대되고 무엇보다 비염환자로써 콧물이 나지 않아서 좋다.

실내는 여러모로 이점이 많다.

그래서 런닝머신이 지겹다는 말이 나에겐 그닥 와닿지 않는다.


요즘 주말에는 남편과 함께 뛴다.

처음에는 계속 혼자 달렸는데 어느 순간부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그가 동행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각자 런닝머신 위에서 8~8.5 시속으로 5km 를 달렸다.


남편은 내가 유일하게 함께 뛰는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혼자 뛰는 걸 선호하지만 남편은 예외다.

나보다 한참 뒤쳐져서 힘겹게 뛰고 있는 걸 보면 언제 저렇게 늙었나 싶고 마음 한켠이 짠해진다.

우리집 김부장 이야기다.


우리집 김부장이 김 대리이던 시절,

나는 운동 따위는 평생 해본 적 없었고 당시에도 운동은 걷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연애 때부터 늘 운동을 열심히 했다. (그렇다고 헬창 수준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세번은 뛰고 자전거를 탔다.

신혼의 막바지 즈음, 그는 갑자기 지금이 마지막일 것 같다며 철인 삼종에 도전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6개월 후에 정말 철인 삼종 경기에 나갔다.

추운 5월의 어느 날, 아이를 임신한 채로 인천 어딘가의 골인 지점에서 남편이 들어오길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의 나는 그의 행태가 잘 이해가지 않았다.

이 고통스러운 걸 굳이 임신한 와이프를 팽개쳐두고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써가며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의 나라면 충분히 이해한다.)

아무튼 12년 전 김 대리는 철인 삼종 경기를 할 만큼 에너지가 넘쳤다.


어느새 뱃속에 있던 아이는 훌쩍 컸고, 김대리는 김부장이 되었다.

그 사이 함께한 시간은 한 줄로는 도저히 압축되지 않는 지난한 시간의 장편 소설이다.

누가 그랬던가.

결혼이란 디저트부터 거꾸로 시작하는 식사라고.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달콤한 순간을 지나 가장 무거운 메인 식사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러닝을 다시 시작한 남편과 함께 가볍게 5km 나이트 런 경기에 함께 참가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체력이 늘었고, 남편의 체력은 형편 없이 줄었다.

12년 전에 날렵하게 뛰던 김대리는 어디 가고 살도 찌고 배 나온 40대 중반 김부장이었다.

빨리 오라고 보채던 내 말에 그가 말했다.

"가장의 무게가 무거워서 몸이 무거운 거야."

순간에 걸맞는 적절한 개그였지만 뒷맛이 짠했다.

몸이 무거워진 우리집 김부장은 그래도 끝까지 뛰었다.

나는 기록 따위는 개나 주기로 했다.

남편과 마지막에 손을 잡고 함께 골인지점을 통과했다.

그리고 우리는 내년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10km 마라톤에 함께 등록했다.

단, 이번에는 '먼저 뛰는 사람이 골인 지점에서 기다리기.' 조건을 붙였다.


러닝은 인생과 같다.

혼자 뛰면 만족스럽고, 누군가와 비교하면 불행해진다.

인생의 동반자와 달리면 귀찮을 때도 있지만, 결국 더 잘 달리게 된다.

꼭 모든 순간을 같이 뛸 필요는 없다.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작가의 이전글스웨덴에서 혼자 뛰는 러너 이야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