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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리 Apr 14. 2023

하소연

아홉 살 아이의 봄(2023.03-2023.05)




나는 화가 많지 않다.


나는 화를 참는다. 화가 나면 도망간다. 나의 오래된 친구들은 내가 아이에게 하는 행동을 보며 무덤덤해 보인다고 평가한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에게 하는 말은 대부분 건조하고 퍽퍽하다. 체념도 묻어날 것이다. 이렇게 말해 봤자, 아이는 하지 않을 테니까. 실제로 아이가 말을 듣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은 일들, 아이가 하지 않으면 더 좋겠지만 아이이기에 용납할 수 있는 소소한 일들은 내버려 두는 편이다. 아이와 하는 감정적 실랑이를 줄이고 싶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유연하고 어떤 면에서는 우유부단한 태도는 품위를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남들 앞에서 흐트러지며 화내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집에서는 집안이 다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면서도, 밖에서 만큼은 체면을 유지하고 싶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즘 아이를 향해 화를 내는 일이 늘었다. 큰 소리로 화를 내지는 않는다. 나는 조곤조곤 아이를 짓밟는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를 준비시키고 학교에 가는 길, 삼사십 분 되는 그 짧은 시간에도 여러 고비가 있다. "책 보지 말고 밥 먹어." 대여섯 번은 하는 말이다. "밥 먹었으면 바로 세수하고 양치질해." 역시 비슷한 수준이다. "서둘러, 학교 늦었어." 이건 아마 일곱여덟 번쯤? "학교에서 안 갖고 온 알림장, 물통, 연필, 공책 등등 오늘 꼭 가져와." 이건 하루 걸러 한번 정도 발생한다.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바쁜 엄마와 달리, 느긋하게 앉아 WHY를 읽고 있는 아이를 보며 화가 날 때도 있고 화를 참을 때도 있고.


집에서 나오면 일단 성공인데 오늘은 우연히 만난 친구들 때문에 진을 뺐다. 아파트 단지를 나오는 길, 친구들을 만났다. 서너 명씩 어울려 등교하는 무리다. 엄마들과도 아는 사이지만 이 무리와 함께 등교하는 건 불편하다. 신경이 곤두서기 때문이다.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 걸어오는 친구들 무리를 보자, 아이가 기어코 달려나간다. 서로 알은체 한다. 그다음엔? 끝이다. 아이는 결국 내 옆에 온다. 아이의 텐션이 살짝 올라간 게 느껴진다. 아이가 상황에 맞지 않은 말을 한다. 아이가 마스크를 벗어 재낀다.   


"마스크 써."

아이가 대답하지 않는다.

"마스크 쓰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너 감기 걸려서 마스크 써야 돼."

여러 번 말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마스크를 쓴다. 저만치 가는 친구들 무리를 뒤쫓으며 나는 괜스레 부아가 치민다.

"같이 가지도 않을 거면서, 왜 친구들을 만나러 뛰어가니?"

아이는 아무 말 없다.  

"친구들이 왜 너랑 같이 안 가는지 아니? 네가 하고 싶은 말만 하기 때문이야. 너는 절대 다른 사람 말을 듣지 않잖아."

꾹꾹 담아두었던 빈정이 결국 아이에게 향한다.

"제발 다른 사람 말 좀 들으라고."

잔뜩 화가 난 아이가 말한다.

"다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갈 거야."

"그건 불가능해."

"왜 불가능해? 칼로 찢어서 들어가면 되지."

"그러면 엄마가 죽을 거야.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우리의 등굣길은 한차례 쓰나미로 또 마무리된다. 앞에 쓴 문장은 고쳐야겠다. 나는 화가 많이 난다. 이제는 좀처럼 참지를 못하겠다. 친구들 무리에 어울리듯 어울리지 않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도대체 뭔가 문제일까? 내가 문제인가? 아이가 문제인가? 둘 다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오늘은 그냥 하소연이다.
기실 억울할 일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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