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흙

지구 반대편 흙 이야기 #프롤로그

by 로하


나의 삶에 '흙'이라는 재료가 들어온 것은 전혀 예측하지 않은 일이었다.


삶의 짧은 쉼표로 시작했던 스페인 살이에서 만난 깜짝 친구와 같았다. 지나가는 취미생활쯤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스란히 시간을 쌓아 여전히 내 옆에 머무르고 있으니 가끔은 나도 낯설고 신기하다.


스페인 세비야의 시간이 익숙해질 즈음 우연히 '이민자를 위한 타일아트 수업' 전단을 보았다. 시내에서 30분 정도 버스로 가야 하는 마을의 문화 센터에서 하는 무료교육이었는데 '이민자'는 아니지만 혹시 기회가 있을까 하여 메일을 보냈고, 선생님으로부터 수업을 들어도 된다는 답장을 받았다.


그렇게 매주 토요일마다 남미에서 온 이민자 여성들과 함께 타일아트를 배웠다.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선생님이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동네 도예가 선생님의 수업을 같이 들을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았고 기왕 30분 버스 타고 간 김에 이것저것 하며 조금 더 머물고 오는 것이 나쁘지 않을 듯해서 선뜻 초대에 응했다.


타일에 장식을 하는 것과는 달리 흙을 만지는 느낌이 참 좋았다. 이렇게 시작된 흙과의 첫 만남은 세비야 예술학교의 세라믹 아트과 2년, 물레과 2년 총 4년간의 계획하지 않은 도자기 유학생활로 이어졌다. 도자기를 배워 무엇을 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만난 친구가 너무 좋아서 그냥 계속 잘 사귀고 싶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스페인에서의 5년을 마무리하며 나의 오랜 여행의 시작이었던 남미로 다시 여행을 갔을 때 나의 관심사가 전혀 다른 키워드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건 '흙'이었다. 여행을 간 땅의 흙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마을이 궁금했고, 사람이 궁금했고 그 흙 안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했다. 자연스럽게 나의 동선 안에는 도자기와 관련된 검색어로 알게 된 지명과 사람들의 이름들이 채워졌고 그 길은 나의 새로운 여행 지도가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 ‘정거장’을 열고 흙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만든다. 그리고 가끔 지구 반대편의 흙이 궁금해 여행을 떠난다. 땅과 흙은 머물러 있는 것이기에 도예 역시 그 땅의 이야기를 담을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도자기는 그 무엇보다도 정주해있는 것, 오랜 터와 같은 것이라 그 땅으로 움직이지 않고 찾아가지 않으면 만나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머물러있는 흙을 여행하는 흙이 만나는 조금은 아이러니한 여행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