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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하 Jun 08. 2020

막내가 여름에 오면 좋겠네

-여름의 시작과 끝, 엄마의 호박잎 쌈

‘어, 호박잎이 나왔네’

부쩍 공기가 뜨거워진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할머니가 내어 놓은 노점 바구니에 담긴 호박잎을 보니 정말 여름이 되었구나 싶었다. 요즘처럼 여름 공기가 갑자기 느껴지기 시작하면 부쩍 먹고 싶어 지는 음식이 있다. 시원한 냉면도, 매콤 새콤달콤한 비빔국수도 아닌 ‘호박잎 쌈’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직접 호박잎을 사서 해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에게 ‘호박잎 쌈’은 유일하게 시골집에 가면 먹을 수 있는, 엄마에게 ‘먹고 싶은’ 음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집밥 메뉴’ 같은 것이다. 


나는 일찍부터 집밥과는 인연이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살던 곳에서 버스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했고, 중간에 학교를 옮기는 것이 좋지 않다며 부모님은 전학을 시키지 않았다. 아침 일찍 시간차 시내버스로 통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침은 항상 바빴다. 그때부터 나는 아침밥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다. 그리고 겨우 집에 와서 먹는 저녁밥의 기억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고등학교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때문에 좀 이른 나이에 학교 기숙사에서의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끼니마다 학교 식당을 뛰어다니며 식판 밥으로 배를 채웠다. 그렇게 나에게 ‘먹는 것’은 언제부턴가 ‘끼니 때우기’가 되었다. ‘집밥’이 뭐야? 가끔 기숙사 친구들과 주말에 큰 맘먹고 읍내에 나가 분식점에서 사 먹는 쫄면이 더 맛있는 나이였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엄마는 방학이면 가끔 집에 내려가는 내게 항상 물어보곤 했다.


“없어” “아무거나”

나의 이런 무심한 대답은 엄마를 조금은 난감하게 했을 것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고, 먹는 것에 취미가 없는 딸에게 타지 생활의 공백을 채워줄 넉넉한 밥상을 준비해주고 싶은 엄마의 고민을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여름 방학이었다.

집에 내려가니 역시나 엄마는 오랜만에 집에 온 막내를 위해 고기며, 낚시 좋아하는 아빠가 막내 온다고 낚아온 생선을 잔뜩 준비해 두었지만 먹는 것은 영 신통치 않았다. 밥상을 치우는 엄마의 표정에서 서운함 같은 것을 느꼈던 것도 같다. 

그때 동네 아주머니가 오랜만에 딸이 왔다고 먹을거리를 이것저것 가져다주셨는데 거기에 호박잎 한 주먹이 있었다. 엄마랑 나란히 앉아 까슬까슬한 호박잎 줄기를 꺾어 잎맥까지 주욱 당겨 다듬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상에 올려진 엄마가 끓인 된장에 싸 먹는 살짝 데친 호박잎이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모르겠다. 호박잎이 남았다고 밥 한 공기를 더 먹는 내가 엄마는 신기한 듯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시골집에 내려가면 밥상에는 종종 ‘호박잎’이 올라왔다. 그리고 엄마는 뭔가 안심이 되는 목소리로 말씀하시곤 했다. 


“막내는 호박잎만 있으면 되지”


나는 그때 호박잎이 특정 계절에 먹는 음식이라는 것도 몰랐다. 집에 호박을 키우지 않았으니 엄마는 아마 호박잎 철에 내가 온다고 하면 이웃집 밭에서 호박잎을 따오셨을 것이다.


스페인에 한동안 떠나 살며, 한 달 정도 한국에 들어왔을 때도 시골집에 내려가니 상에는 반가운 호박잎이 가득했다. 다른 반찬은 뒤로하고 된장에 호박잎 쌈을 맛있게 먹는 나를 보던 엄마는 말했다.


“그래도 호박잎이 나는 계절에 와서 다행이네.”


그제야 나는 호박잎 쌈이 여름의 시작부터 끝자락 정도까지 먹는 별미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계절에 막내가 온다고 하면 엄마의 밥상 걱정이 조금은 덜어졌을 것이라는 것도 가늠할 수 있었다. 새삼 '이거 먹고싶어, 저거 먹고 싶어' 하는 딸이 아닌 것이, 음식에 무심한 딸인 것이 엄마에게 미안했다.


올해도 호박잎이 억세어지기 전에, 그러니까 여름이 가기 전에 시골집에 내려가야겠다. 막내가 간다고 하면 어김없이 엄마는 더운 여름날, 이웃집 밭에 호박잎을 따러 가시겠지만 그것이 엄마의 반가움이라는 것을, 안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정도의 호박잎 불효는 슬쩍 눈감아 버리기로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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