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첨부하여 보냅니다."
언제 들어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한 마디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이 문장을 고르겠습니다. PDF 파일을 열기 전, 심호흡을 합니다. 시안이 마음에 들면 종일 깨춤을 추고, 예상한 결과물이 아닐 땐 시름시름 앓거든요. '아 내가 전달을 제대로 못했나?' 자책하면서요.
지난주 예고했던 대로, 이번 주에는 책 만들며 가장 자주 지지고 볶는 디자이너와의 협업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서로 만족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편집자와 디자이너는 많은 시간 씨름합니다. 서로가 원하는 바, 의도하는 바를 전달하고 구현하는 데 애를 쓰지요. 그 첫 번째 결과물이 '시안'이고요. 어떻게 하면 그 간극을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하며 방법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1. 디자이너의 기존 작업을 확인하고, 방향이 맞는 디자이너와 작업한다
책의 방향에 맞는 디자이너를 척척 모실 수 있다면 가장 좋습니다. 어떤 책은 사진이 많이 들어가고, 어떤 책은 제작 사양이 복잡하고, 어떤 책은 가독성이 가장 중요하고... 책의 성격마다 디자인 포인트도 달라지니까요.
그래서 평소 디자인이 눈에 띄는 책을 잘 살펴보고, 판권면에서 디자이너 이름을 찾아 팔로우합니다. <언젠가 꼭 협업> 리스트에 올려두고, 잘 맞겠다 싶은 기획이 있으면 제안을 드려요. 물론 예산과 일정 문제로 늘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게 함정...
디자인 스튜디오와의 소설 작업:
드라마 작가 출신 저자의 장편 소설로, 이야기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게 특징이었기에 표지에 소설 속 한 장면이 담기길 바랐습니다. 예산상 일러스트를 따로 의뢰하긴 어려운 상황이었고, 비슷한 소설과 에세이 작업을 많이 한 베테랑 디자이너를 찾았어요.
저자가 참고한 실제 장소 사진과 관련 이미지, 메인 장면을 묘사한 글을 최대한 정리해 보냈고, 시안을 보자마자 상상했던 장면이 떠올라 도파민이 터졌던 작업! 베테랑이 왜 베테랑인지 깨달았던 즐거운 작업이었어요.
2. 대화를 많이 나눈다
결과물이 마음에 들려면, 작업자와의 '싱크'가 잘 맞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만들고자 하는 책에 대해 대화를 많이 나누고, 생각의 차이를 좁히려 애쓰는 편이에요.
편집자 시절엔 회사에서 디자이너에게 가장 많이 기웃거리는 편집자 중 하나였어요. 밥 먹자고 하고, 예쁜 책 나오면 사서 들고 가고, 기획 단계부터 수다를 떨며 종이부터 제작 사양까지 디자이너의 의견을 많이 반영하곤 했어요.
인하우스 디자이너와의 사진 에세이 작업:
사진 비중이 큰 감성 에세이라 디테일한 디자인 요소가 구석구석 들어가기를 바랐습니다. 종이도 일반 책과는 달랐으면 했고요. 모처럼 디자인 팀장님과 취향이 맞아떨어져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이디어를 내고 참고 도서를 주고받으며 작업했어요.
어느 날 야근하다가 디자인팀 불이 켜져 있어 가보니,
팀장님이 중제목에 들어갈 요소들을 손수 그리고 계시더라고요. 이런 열정 10년 만에 처음이라며 웃던 팀장님의 옆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과정도 즐거웠지만 그해 ‘올해의 디자인‘ 후보에도 올라 뜻깊었던 작업이었어요.
프리랜서 디자이너와 일할 때는 그런 유대 형성이 어렵기에, 대신 자료를 상세히 작성해 공유합니다. 한번 작업한 디자이너와는 꾸준히 인연을 이어가려고 하고요.
3. 피드백을 명확하게 한다
충분히 의도를 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물이 나왔을 때, 격한 내적갈등이 시작됩니다. 협업이 어려운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면 (제 경우에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과 좋은 결과물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싸우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냥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 싶은 순간이 있고, 실제로 적당히 넘어간 적도 있지만, 그렇게 나온 작업 중에 만족스러운 결과물은 없더라고요.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다음 작업으로 이어지기가 어렵고요.
그래서 요즘은 받은 시안 중 최선을 골라 타협하기보다는, 명확하고 솔직하게 피드백을 전달하고 대안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그러기 위해 다시 2번으로 돌아가 대화를 충분히 나누고요.
절친한 디자이너와의 아트북 작업:
첫 직장에서 만나 지지고 볶다가 절친이 된 디자이너와 오랜만에 뭉쳐 난이도 높은 아트북 작업을 했습니다.
작업 전 한 가지 약속을 했어요. “친하다고 대충 얼버무리지 말자, 피드백은 반드시 솔직하게 하자.”
서로 눈치 없이 의견을 내고 욕심껏 하느라, 너무너무너무 힘들었지만, 그만큼 너무너무너무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왔어요.
한동안 다시 보지 말자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최근 작업 중 가장 만족스러운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아마 저희는 다시 뭉치겠죠!
4. 디자인을 공부한다
응? 웬 디자인 공부? 디자인 툴을 공부해서 직접 해야 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고요. 디자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이해가 있을 때 소통이 원활해진다는 걸 느낍니다. 최소한 "이렇게 해보면 안 될까요? 아 아니네요. 처음으로 돌려주세요" 같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이미 출간된 다른 책들이 가장 좋은 교재이고요, 디자인 스튜디오 기반의 출판사에서는 조금 더 과감하고 실험적인 디자인이 나오는 편이니 참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가격 협의는 솔직하고 정중하게 한다
작업 비용에 대한 이야기는 늘 어렵습니다. 어려워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야기죠. 이때 가능한 예산의 기준을 세워두는 것이 많은 걸 해결해 주는 것 같습니다.
작업 비용을 먼저 말씀해 주실 때도 있고, 얼마를 생각하고 있는지 되묻기도 하는데요. 처음엔 내가 말하는 금액이 혹시 실례가 되는 금액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머뭇거리곤 했어요.
지금은 질문을 받으면 “저는 이 정도 예산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능하실지, 혹시 실례가 되는 금액이라면 꼭 알려주세요“라고 말하곤 합니다.
시안을 조율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화를 많이 하고요.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넘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한두 번 일할 것도 아닌데 그냥 하자 vs. 한두 번 일할 게 아니니까 정확히 하자. 중에 후자를 택하려고 노력해요. 쉽지는 않지만요.
얼마 전에 <유퀴즈 온 더 블록>에서 이효리 님이 나왔어요. 20대에는 까탈스럽게 일했다고, 뭐 하나도 그냥 못 넘어가고 다 확인해야 하는 사람이었다고, 대신 결과는 늘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30대가 되고 어느 순간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래요, 좋아요” 하고 넘어갔더니, 결과가 별로였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앞으로는 다시 악에 받쳐서 일해볼 거라는 다짐을 들으며 협업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지금 제가 바라는 건, “이 사람이랑 일하면 힘들어도 결과물이 너무 마음에 들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경험과 내공이 충분히 쌓여 “이 사람이랑 일하면 힘도 안 들고 결과물도 너무 좋더라”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역시나, 쉽지 않겠지만요.
그때까지 애써볼게요. 아자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