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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Feb 05. 2024

방황을 끝내는 두 갈래 길,  죽음과 직면에 대하여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삶은 혼돈이다. 스스로 삶을 컨트롤하고 있다고 믿을수록 혼돈은 갑작스러운 사건의 옷을 입고 기묘하게 등장해 깊은 타격감을 준다. 인생에 정답이 없다고 하는 말은 이러한 감각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방황은 인간의 삶에 장착된 기본 값일지 모른다.




레프 톨스토이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의 중심인물은 안나와 레빈으로, 이들 역시 각자의 혼란 속에서 방황을 이어간다. 이야기의 굵은 얼개는 가정생활의 희로애락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첫 문장에는 이 책의 핵심 내용이 압축되어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 1, 13쪽, 민음사)      


안나는 귀족 사회에서도 그야말로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가정부인이다. 그는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성으로 사교계의 핵심 인물로 그려진다. 다만, 다소 나이 차이가 나는 남편 알렉세이와의 관계에서는 생기를 찾을 수 없다.


 알렉세이는 관계에 서툴고, 딱딱하고 차가운 성격으로 일에 파묻혀 사는 인물이다. 안나가 타인들과 대화하는 장면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섬세하게 관계를 맺어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안나와 알렉세이의 관계는 정서적 교감이 결핍된 생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나는 브론스키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남편과의 관계에서 오는 위선과 부자연스러움을 의식하지 못했다. 기차역에서 브론스키를 보자마자 이끌림을 느끼는 안나는 이후 남편의 존재와 가정생활에 염증을 느끼는데 톨스토이는 이러한 심경의 변화를 단 한 줄의 대사로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차가 페테르부르크 역에 정차하여 그녀가 객차 밖으로 나온 순간, 가장 먼저 그녀의 주의를 끈 얼굴은 남편의 얼굴이었다. ‘아, 어쩜! 저이의 귀는 어째서 저렇게 생긴 걸까?’ (안나 카레니나 1, 229쪽, 민음사)    

  

이후 안나의 행보는 브론스키의 아이를 출산하면서 가정을 떠나는 것으로 귀결되는데, 불륜이 난무하는 귀족 사회의 위선에도 불구하고 이는 안나가 사교계에서 퇴출되는 원인이 된다. 부도덕함은 불륜에 있지 않고 가정과 자녀를 버린 것에 있는 것이다. 더불어 가정을 떠난 아내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정체성을 잃은 무존재이기도 했을 것이다.


안나는 ‘신이 자신을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규정하지만, 아들의 존재는 결국 안나에게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되었다. 안나가 특별히 모성이 강한 여성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마음으로부터 아들을 버릴 만큼 시대 전복적인 캐릭터도 아니었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브론스키와의 결혼은 아들과의 영구적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들을 자신이 키울 수 있을지 없을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전남편 알렉세이와 브론스키였던 것이다.        


브론스키 입장에서 다른 남자의 아들을 데려오는 것은 꽤 복잡한 일이었다. 귀족 사회에서 자녀는 자신의 명예와 재산을 물려줄 수 있는 존재였으며 브론스키 또한 소설 안에서 그 바램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브론스키는 자신의 안정을 위해 안나에게 결혼을 재촉했으나 안나가 아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회피하며 이와 관련한 대화를 애초에 차단해 버린다.


안나는 마음속으로 브론스키를 원망하며 더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이처럼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안나의 분열과 위악은 아들에 대한 갈등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안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그는 도대체 어디에 있지? 그는 어째서 날 고통 속에 혼자 내버려 두는 걸까?' 문득 그녀는 비난의 감정을 품은 채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가 아들에 관한 것을 그에게 일절 숨겼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안나 카레니나 2, 636쪽, 민음사)      


안나는 사실혼 관계에서 브론스키도 전남편과 같은 이름인 알렉세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것이 꽤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수없이 많은 심리적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그들의 관계가 겉으로는 안정기에 접어들수록 브론스키의 관심은 사회적인 것으로, 즉 밖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안나의 정체성은 다시 한번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사랑을 찾아 모든 것을 버린 안나가 마주하게 된 것은 또다시 밖으로만 도는 남편과 이해받지 못하며 감정적으로 메마른 가정생활이었다.


브론스키는 능력 있는 군인으로 야망이 있는 남자였으나 그 역시 안나를 만나면서 퇴역하게 된다. 이후 브론스키는 갑자기 그림을 그리는 등 사회적 방황을 거듭하다 병원과 학교를 지으며 경영자의 길로 접어든다. 부와 명예를 되찾은 브론스키는 사교계에서도 안정적으로 활동을 개시한다.


브론스키는 안나와의 결혼을 통해 이 모든 개인적 혼란의 종지부를 찍고 싶어 한다. 도돌이표처럼 안나의 아들 문제가 따라오지만 브론스키는 안나의 혼란을 읽어내지 못한 채 자기 아내의 의처증에 분노할 뿐이다.      


결국 안나의 내적 분열은 죽음을 불러온다. 안나는 자신의 사랑이 시작되었던 기차역에서 그 사랑의 방식대로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대부분의 등장인물에게 충격을 안겨준 안나의 죽음은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에서 그려낸 엠마의 죽음과는 다르게 읽혔다.


엠마의 죽음은 그에게 죄책감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사회적 징벌을 차단하는 효과를 불러온 적극적 죽음으로 읽히는 반면 안나의 죽음은 자신을 고립시키는 귀족사회와 내면의 고통로부터의 사라짐, 그마저도 안나가 수없이 해왔던 후회를 다시 한번 되풀이하는 자기 도피적 죽음으로 느껴졌다.


안나는 죽음 직전에 이르러서야 자기가 꿈꾸었던 사랑의 허상을 직면한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하는 가부장적 사회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 안나의 죽음은 그가 브론스키를 만난 이후 수없이 반복했던 또 한 번의 실패일 뿐이다.      




이러한 안나의 죽음은 작가 톨스토이의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그가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그려내는 인물은 레빈의 아내인 키티이기 때문이다. 키티 장면을 읽으면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최진실이 등장했던 옛 광고 카피가 떠오르기도 했다. 키티의 모습은 브론스키를 만나기 전 모범적인 안나의 생활을 상상해 볼 수 있는 힌트가 되기도 했다.


키티와 레빈 역시 결혼 전후로 여러 갈등을 겪게 되나 키티는 현명하게 그 모든 갈등을 풀어나간다. 이들 커플의 다른 점은 그들의 사랑에 있기도 하다. 키티와 레빈은 서로 사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사랑은 종교적인 헌신을 내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레빈 역시도 사회적, 내면적 방황을 되풀이한다. 우선 레빈의 사회적 방황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귀족이자 당시 러시아 농촌의 지주로서 농민들의 무지성과 게으름으로 인한 악습을 바로잡고자 했다. 레빈은 농민들과 함께 노동할 수 있는 진정성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의 계획을 번번이 실패한다. 그의 생각대로 농민이 움직여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빈은 귀족들의 탁상공론을 혐오하며, 귀족들이 제시하는 다양한 사회 제도에도 공감하지 않는다. 농민들의 무지성에 대해서는 유럽에서 유입된 교육보다 농민들에게 경제적인 이익을 주는 것이 우선이라는 실용적인 태도이다. 그럼에도 귀족들을 향한 농민들의 오랜 반목까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레빈은 자신의 제안에 응하는 몇몇 농부들과 협동조합 비슷한 사회적 실험도 감행하지만 그것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까지는 소설 안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건지도?) 레빈은 이 모든 과정과 지주로서 자신의 사회적 고민들을 저서를 집필하며 정리해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레빈이 쓰는 책의 주제는 아마도 '러시아 스타일의 농촌 개혁'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키티와의 결혼 이후에도 레빈의 내면적 갈등은 끊이지 않는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와 자신의 서툰 방식으로 인해 결혼 생활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다행히 결혼 전 겪은 시련으로 자신의 위선을 인식하면서 성숙한 태도를 장착한 키티의 솔직함과 헌신적 태도는 그들이 갈등을 직면하여 대화로 풀어갈 수 있게 했다.


또한 레빈이 임종을 앞둔 형을 바라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할 때, 키티는 환자가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 레빈은 키티를 배우자로서 존경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외골수였고 다소 강퍅했던 성격도 키티와 함께 유연하게 바뀌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완전하지 않았다.      


레빈은 때때로 살아야 할 필연적 이유를 찾지 못해 죽음에 대한 충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아이를 출산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신의 이름을 불렀고, 무신론자였던 그는 그때의 경험을 확장해 종교에 귀의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불완전함과 그로 인한 삶의 허무를 받아들이며 통합의 길로 나아간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안나에게 결여된 것으로 톨스토이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로 제시하는 두 가지 길 중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톨스토이는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켜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삶의 방식을 쫓아가게 한다. 톨스토이의 집필 방식은 인물의 행동과 대화, 순간적 내면의 찰나까지 포착하여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읽는 동안 마치 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주로 귀족들을 내세운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의 삶은 얼핏 비슷하게도 보이지만 그들은 순간의 선택으로 다른 결말을 맞이하였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끝없이 방황하며 자기 삶 안에서 극적인 변화를 보인다. 특히 안나와 같이 안정적으로 살아왔던 인물일수록 그 변화의 폭은 컸다. 안나는 브론스키라는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삶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으나, 레빈은 자신의 무너진 삶과 가치를 끊임없이 재건하며 인격적으로 통합된다. 그는 미숙했던 처음과는 사뭇 다른 존재가 되었다.


결국 작가 톨스토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레빈의 삶 속에서 읽을 수 있다. 방황에도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변화일 것이며, 변하지 않고 기존의 가치관을 반복하고자 한다면 누구라도 상징적인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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