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 Mar 13. 2024

안개와 죽음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

죽음은 안개가 깔린 인생길 끝에 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죽음은 항상 그곳에 존재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안개만 바라보며 만년을 살 것처럼 살아간다. 나에게 죽음은 완벽한 단절이다. 죽음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이나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구천을 떠도는 혼들이 있기는 하나 그들이 인간과 교감할 수는 없다.

깊은 단절, 알 수 없는 세계. 죽은 사람은 많지만 죽음의 세계를 명명백백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죽음에 대한 상상으로부터 예술이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닐 셔스터먼의 SF 소설 <수확자>에서 미래 인간은 죽음을 완벽하게 극복했다. 철없는 몇몇 청소년들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자살을 오락거리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도 그들의 부서진 육체는 다시 재생되니까. 그 세계에서 죽음과 함께 사라진 것은 종교와 예술이다.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 현재까지 산 사람 사이에는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해 여러 말들이 떠돈다. 일정한 구조 속에서 확장된 상상은 죽음을 다룬 예술작품이 되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다루는 것은 죽어가는 이의 공포다. <안나 카레니아>와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서의 죽음은 문제의 종결이며, 장재현 감독의 영화 <파묘>에서 죽음은 사무친 원한이며 복수다.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 죽음은 삶의 일부, 과정 혹은 쉼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마침표를 생략하거나 마침표 대신 쉼표를 쓰고 있다.)

<아침 그리고 저녁> 속에서 그려지는 죽음은 일상적이고 고요해서 편안하게 느껴졌다. 예술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죽음은 많은 경우 강렬하고 기묘한 사건이었다. 죽음은 일상과 분리되어 있어서는 안 될 일로 다뤄지고는 했다. 그러나 욘 포세의 소설은 잠에서 깬 뒤 아침을 맞는 일처럼 저녁의 노을 속에 스민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임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제 자네도 죽었다네 요한네스, 페테르가 말한다
오늘 아침 일찍 숨을 거뒀어, 그가 말한다
내가 자네의 제일 친한 친구여서 나를 이리로 보낸 거라네, 자네를 데려오라고 말이야, 그가 말한다
그러면 게망은 뭐 하러 걷어올렸나, 요한네스가 묻는다
자네 삶과의 연결을 끊어야 하니 뭔가는 해야 했지, 페테르가 말한다
그런 거로군, 요한네스가 말한다
그런 거라네, 페테르가 말한다
(중략)
그래 이제 길에 접어들었네, 페테르가 말한다
그리고 페테르와 그는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몸을 돌려 저 멀리 뒤편, 저 아래 멀리, 싱네가 서 있는 모습을 본다, <본문, 130-134쪽>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사유를 죽음으로부터 시작했음을 밝힌다. 삶의 끝에 죽음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불을 훔쳐 신의 노여움을 산 시지프처럼 인간은 삶이라는 무거운 바위를 끊임없이 산꼭대기로 밀어 올린다. 그러나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카뮈는 부조리를 느끼는 인간 스스로 삶을 긍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카뮈가 말하는 저항인 것이다.   



죽음이 삶의 일부이자 과정이라면, 삶은 애써 긍정해야 할 저항이 아니라 선물임을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더 확장하여 천상병의 시처럼 이 삶이 '소풍'일뿐이라면. 우리는 왔던 곳으로, 경계 없이 고요하고 빛과 물이 하나인 무의 세계로 그저 돌아갈 뿐이라면. 삶이 아니라 죽음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라면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방황을 끝내는 두 갈래 길, 죽음과 직면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