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적으로 삶을 살아오던 한 남자가 그림을 그리겠다며 직장도 가정도 박차고 뛰쳐나간다. 그의 이름은 찰스 스트릭랜드. 스트릭랜드에게 그림은 어떤 의미였을까? 세상과 타인에게,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도 아무 관심이 없었던 그가 그림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영국작가 서머싯 몸의 장편소설 <달과 6펜스>의 이야기이다.
<달과 6펜스>는 오랜 시간 동안 찰스 스트릭랜드를 지켜보았던 화자 '나'의 기록이다. '나'는 작가로, 평온한 일상에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내심 안정적인 삶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자기 욕망대로 사는 삶'을 '모험'이라 느끼며 철저하게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한다. 그는 다소 냉소적인 시선으로 주변인의 위선과 허세를 꿰뚫어 보고 그것을 기록한다.
그의 촘촘한 그물망에도 걸리지 않는 인물이 스트릭랜드다. 스트릭랜드는 거칠지만 위선과 허세가 없는 인물이다. 자기 욕망에 솔직하며 위험을 위험인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경계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스트릭랜드가 쫓는 단 하나의 이상향은 그림이다. 오직 그림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를 그리고자 했다. 그에게 그림은 타인에게 말을 거는 행위가 아니었다.
스트릭랜드의 지향점 반대쪽에 스트로브가 있다. 스트로브는 자신이 잘 팔리는 화가라는 것에 만족하며, 주위 가난한 예술가를 지원한다. 스트로브는 호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보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그림을 보는 심미안을 가졌으나 자신의 그림은 끊임없이 자기복제하는 인물이다. 예술의 영역에서 천재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스트로브는 현실적으로 그러한 지점을 잘 알고 있었던 화가가 아니었을까. 그래도 스트로브는 팔리는 화가로, 어쨌든 그림으로 먹고 살아가면서 가난한 예술가를 지원할 수도 있으니 그만큼도 어디냐 싶다.
화자인 '나', 스트릭랜드, 스트로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예술지상주의자'들이다. 그들에게 예술과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인간 삶에서 최고의 목적을 지향한다. 예술은 도덕이나 정치, 종교적 가치보다 우위에 있다. 오직 예술 그 자체가 목적인 삶인 것이다.
스트릭랜드의 예술을 향한 열정과 지향에 감명받은 '나'는 스트릭랜드의 쓰레기 같은 인성에 치를 떨면서도 그의 세계에 공명하고 설득된다. 스트로브 또한 스트릭랜드가 그린 자기 아내의 누드화를 차마 찢어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돌보기 위해 함께 고향으로 가자고 제안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스트릭랜드는 원시적인 힘을 쫓아 타히티 섬으로 들어간다. 스트릭랜드는 나병을 앓으며 온몸이 썩어가도 집 안 벽을 꽉 채워 자신의 이상향을 그림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유언으로, 완성된 그림이 남아있었던 그 집을 태워버리라고 한다.
스트릭랜드에게 그림은 어떤 수단이 아닌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필연적 조건 그 자체였다. 그것은 도구로서의 그림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그림이었다. 달에 사로잡힌 야성의 인간은 달 자체가 되고자 했다. 자신의 눈에만 비친 세계를 스스로의 예술적 감각으로 재현함으로써 그는 그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