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경주시민운동장
누군가 내게 던진 한 마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망치를 맞은 듯한 기분이란 말은 너무 흔하니까, 호날두가 찬 무회전 프리킥을 정통으로 머리에 맞은 기분이라 표현하는 게 좋겠다.
'오늘의 축구' 브런치에 글을 쓰기 전, 먼저 등록된 글들을 살펴봤다.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 산티아고 베르나우, 지난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열린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대단히 움츠려졌다. 목욕탕에 막 들어섰는데 등에 용을 박은 어깨 형님들이 때를 밀고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되나.
아무튼 그에 걸맞은 '고급진' 글을 쓰기 위해 한참을 고민했다. 별에 별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물론 하나도 실행에 옮기질 못했다. 호날두에게 프리킥을 한 대 맞고야 깨달았다. 일단 먼저 써야 된다고.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물론 잘하는 편도 아니었다.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일단 공부를 해야 되니까 학교를 다녔다. 요컨대 평범한 학생이었다. 지금도.
글이 쓰고 싶어졌다. 어느 순간. 축구 관련 글을 쓰고 싶었다. 나중에 대학교에 가서 글을 쓰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머릿속에 쓰고 싶다는 욕구가 사라지질 않았다. 소변을 해결하고 바지 지퍼를 올리는 순간에도, 왕건이 코딱지 발굴에 성공한 순간에도 자꾸만 글이 쓰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 썼다.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대한축구협회 성인리그 명예기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지원했다. 얼마 뒤 뽑혔다고 전화가 왔다. 축구회관에서 열리는 OT에 참가하기 위해 생전 처음 혼자 서울에 갔다. 대구에도 지하철이 있었기에, 다행히 신발을 벗고 지하철을 타지는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 축구협회 사람들, 대부분 나보다 세, 네 살 많은 명예기자들.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이력 밖에 없던 나였다. 이런 환경은 막다른 골목에서 또다시 어깨 형님들을 만난 것 만큼이나 어색했다. 물론, 그런 어색함 가득한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OT 후 먹은 전골은 참 맛있었다.
2012년 내가 대한축구협회 명예기자를 처음 시작했을 때 K3리그는 '챌린저스리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2007년 리그가 처음 창설 됐을 때의 이름은 'K3리그'였다. 이후 '챌린저스리그'로 불리다가, 어느 순간 'K3 챌린저스리그'로 이름을 변경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다시 'K3리그'가 됐다. 무슨 뫼비우스 띠도 아니고!
2012년 3월 3일 첫 취재를 하기 위해 경주시민축구장으로 갔다. 관중석을 지나 기자석으로 올라갔다.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라는 닐 암스트롱의 말이 떠오를 만큼 경건한 발걸음이었다. 물론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도도하고, 시크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경주시민축구단은 디펜딩 챔피언이었다. 반면 예산유나이티드는 대부분의 K3 구단이 그렇듯 없는 살림에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운영하고 있었다. 선수 전력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였다. 당연히 경주의 승리를 점쳤다.
그러나 선제골은 예산의 차지였다. 이후 경주는 득점에 성공하지 못했다. 예산이 1-0으로 승리했다. 뜻밖의 승리를 잡은 예산유나이티드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예산 구단주는 선수들에게 저녁을 사야겠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경주는 홈경기가 끝난 뒤 항상 경품추첨을 한다. 경품권이 들어있는 상자를 들고온다. 한 손에 경품권을 든 관중들이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며 추첨 현장을 빙 둘러 반원을 만든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면 환호하며 앞으로 나가 경품을 받는다. 주위에서는 축하를 해준다. K3만의, 경주만의 이벤트다.
1등상은 항상 자전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 가지 후회되는 게 한 번 정도는, 딱 한 번 정도는 나도 경품 응모를 해보는 건데. 기자라는 생각에 응모권에 쉽사리 손이 가질 않았다. 눈 딱 감고 응모했으면 자전거에 당첨될 수도 있었는데!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글을 쓰고 있다. 성실하게, 꾸준히 쓰는 건 아니지만 나름 연속성 있게 무언가를 쓰고 있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 간단하다. 먼저 냉장고 문을 연다. 그리고 코끼리를 안에 넣는다. 신선해 보이는 코끼리는 신선식품 칸에 넣어도 무방하다.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 그럼 끝!
그러니까 '일단 글을 쓰자'라는 생각을 잊어버리지 말자는 이야기다. 정말, 가끔씩은 까먹어도.
글을 써내려 갈수록 경주시민축구장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남들에게 직관을 권유하기 위해 글을 쓰는데, 오히려 내가 직관을 가고 싶어지다니. 일단 나라도 한 명 직관을 가고 싶어 하게 됐으니, 아무도 안 가고 싶어 하는 것보다는 나은 거겠지.
일단 가자, 다른 생각 말고.
운이 좋다면 경품으로 자전거를 탈 수도 있다.
경주에서 대구까지 자전거를 어떻게 가져 올까.
그냥 자전거 타고 국도를 달리자.
글·사진 - 정재영 (축구전문 팀블로그 인스텝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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