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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축구 Jul 01. 2015

카카의 역사에 스며드는 순간

영국 맨체스터, 올드트라포드


런던, 통신원


2007년 나는 런던에 있었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프리미어리그 통신원 아르바이트를 했다. 수입이 뻔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았다. 영국 런던의 물가는 인정머리가 없다. 지낸다기보다 버텼다. 30대 중반이 되어 가난한 대학생 코스프레라니. 다행히 불만은 없었다. 프리미어리그 취재증만 목에 걸면 무슨 경기든 티켓을 살 필요가 없었으니까.


당연히 많은 경기장에 자주 갔다. 한국인 선수가 뛰는 경기는 인터뷰 기사를 팔기 위해 찾아갔다. 그렇지 않은 경기는 자기 만족을 위한 대상이었다. 왓포드와 뉴캐슬의 경기도 보러 갔다. 현장 취재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최소 2경기 이상 현장을 취재했다. 한국인 선수의 경기가 없을 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최우선 선택했다. 당연하게도.


챔스 경기에 한국인 선수가 뛰면 더더욱 당연히


2007년 4월 24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 올드트라포드에서는 2006-07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1차전이 있었다. 박지성은 없었다. 미국 콜로라도에서 무릎 연골 수술을 받은 직후였다. 한국인 선수의 인터뷰 기사가 없으면 수입이 없다. 교통비 청구도 불가능하다. 그래도 갔다. AC밀란이 보고 싶어서. 최강 밀란.


파올로 말디니(레전드!), 알레산드로 네스타(쿨!), 젠나로 가투소(마초!), 클라렌스 시도르프(클래스!), 안드레아 피를로(비유티!) 그리고 카카(지니어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축구의 신들이다. 그들이 그날 모두 선발로 뛰었다. 귀로 UEFA 챔피언스리그 테마곡을 들으며 눈으로 경기 전 정렬한 전설들을 보았다. 영국 현지 기자들조차 경이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밀란 팬 전용 출입구 앞을 에스코트하는 경찰


영국에선 통신원이라서, 귀국해선 축구 기자라서 당연히 많은 현장을 다닌다. 다양한 사건을 직접 목격한다. 이 경기로부터 2주 전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맨유와 AS로마의 7-1 경기도 현장 취재했다. 2008년 5월 모스크바에서 존 테리가 미끄러지는 것도 봤고, 유로 2008 결승전에서 나온 페르난도 토레스의 결승골도 현장에서 봤다. 심지어 회사원 시절(2003년 8월) 휴가 중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맨유 데뷔전도 '직관'했다. 제이제이 오코차를 보러 갔다가 호날두라는 괴물을 발견하다니 정말 운도 좋다.


그러나 나는 이날 맨유-밀란 경기에서 나온 카카의 두 골을 잊을 수가 없다. 


골이 들어가는 과정이 경이적이지도 않았다. 엄청난 오버헤드킥도 아니었고, 장거리포도 아니었다. 첫 골은 페널티박스 안에서 왼발로 넣었고, 두 번째 골은 상대 수비수들의 혼란을 노린 스마트골이었다. 심지어 맨유가 3-2로 승리한 경기였다.


올드트라포드로 가는 길목에 있는 베팅방. 경기 전은 항상 인산인해



아, 경이로운 카카


그날 나는 올드트라포드에서 카카가 인간의 운동능력을 뛰어넘는 순간을 목격했다. 전반 22분 시도르프가 박스 안으로 들어가는 카카에게 전진 패스를 보냈다. 카카는 퍼스트터치로 볼을 앞으로 길게 보낸 뒤 질주했다. 맨유 수비수들이 있었다. 그런데 카카는 한 번에 앞으로 쭉 나갔다. 두 번째 터치는 왼발 슛이었다. 골인. 인간이 그렇게 빨라질 수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15분 뒤 카카는 두 번째 골을 넣었다. 높이 뜬 볼이 맨유 진영으로 낙하했다. 대런 플레처가 볼을 처리할 태세를 갖췄다. 카카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낙하 궤적과 플레처의 움직임을 차례로 보는 카카의 고갯짓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카카가 갑자기 스프린트를 시작했다. 직접 걷어내지 않고 바운드되기를 기다릴 거라는 플레처의 미세한 몸짓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카카는 원바운드된 볼을 머리로 따냈다.


정지 상태였던 카카가 플레처에게 도달하는 그 속도. <여고괴담> 1편을 보셨는가. 복도 저 끝에서 귀신이 스틸컷으로 쿵쿵쿵 다가오던 명장면. 그때 카카는 그렇게 움직였다. 질주가 아니라 점에서 점으로 옮겨가는 순간이동. 기자석에서 “어?”라는 외마디가 나오자마자 카카는 이미 플레처와 볼의 사이에 머리를 집어 넣었다. 그 장면이 지금까지 너무나 생생하다.


그 다음 카카는 가브리엘 에인세의 머리 위로 볼을 툭 차올려 간단히 제쳤다. 에인세와 파트리스 에브라가 다시 달려들자 둘 사이에 있던 볼을 다시 머리로 톡 건드려 빼냈다. 충돌한 에인세와 에브라가 나동그라졌다. 우당탕하더니 수비수 세 명은 구경꾼이 되어있었고, 카카는 에드빈 판 데르 사르와 일대일로 맞서 있었다. 끌 것도 없이 카카의 네 번째 터치. 그걸로 끝이었다. 맨유 1-2 카카.


맨유 vs 카카 (골장면 2분 43초 / 4분 40초)



I was there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기억해내는 단초가 존재한다. 축구 팬이라면 멋진 골이나 명승부가 그런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1983년 초등학교 등굣길 도중 길거리 아저씨들의 환호성을 기억한다. 멕시코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준결승전에서 김종부가 브라질을 상대로 선제골을 터트린 순간이었다. 왜,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속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추억 소환 장치들이 있지 않은가.


카카의 두 골도 벌써 8년 전 사건이 되었다. 당시 나는 청승맞은 해외 체류자였다. 스타벅스의 초콜릿 브라우니를 돈 아낀답시고 참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카카의 골 장면을 기억하면 입 꼬리가 스윽 올라간다. 카카의 최절정기를 같은 공간에서 공유했다는 뿌듯함 때문일 것 같다.


올드트라포드 앞 매대에서 파는 티셔츠


영국 축구 팬들은 ‘I was there’(그때 나는 거기 있었다)라는 표현을 쓴다. 역사적 장면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자부심이다. 2007년 4월, 내 눈앞에서 카카가 골을 넣었다. 비현실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때 나는 거기 있었다.



글·사진 - 홍재민 (포포투 기자)

교정 - 오늘의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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