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도르트문트, 지그날 이두나 파크
2001년 초부터 약 5년간 독일에 체류하면서 2년 가까이 거처로 머물던 브레멘. 그곳의 정든 베저슈타디온을 제외하면 내가 가장 많이 찾은 구장은 단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홈 구장 '베스트팔렌슈타디온'이다. 현재는 독일 보험회사 지그날 이두나가 구장 스폰서십을 체결해 '지그날 이두나 파크'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지만 여전히 나에겐 베스트팔렌슈타디온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사실 독일엔 펠틴스-아레나(샬케 홈)와 알리안츠 아레나(바이에른 뮌헨 홈), 그리고 에스프릿 아레나(포르투나 뒤셀도르프 홈) 등 베스트팔렌슈타디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현대적 설비를 갖춘 화려한 구장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들에 비하면 베스트팔렌슈타디온은 낙후된 설비의 구닥다리 구장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심지어 화장실에선 고약한 지린내가 코를 찌른다. 경기장 안에 들어서기 전까지 베스트팔렌슈타디온은 나에게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왔다.
하지만 관중석에 들어서는 순간 이 경기장은 사람을 홀린다.
먼저 사이즈에서 압도한다. 베스트팔렌슈타디온은 매 경기 평균 8만명 이상의 관중을 불러모으고 있다. 매 시즌 축구팀 평균 관중 순위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는 구단이 다름 아닌 도르트문트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특히 이곳의 백미는 바로 도르트문트 홈 서포터 응원석인 '남쪽 스탠드(die Südtribüne)'다. 저마다 시즌권을 소지하고 이곳에 자리잡은 도르트문트 팬들은 '노란 장벽(Die gelbe Wand)'이란 애칭으로 불릴 만큼 경기 내내 쉬지 않고 도르트문트 구단의 상징색인 노란 깃발을 흔들며 뜨거운 응원 열기를 내뿜는다.
게다가 이들은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기 전 기상천외한 걸개와 화려한 카드 섹션으로 경기장 분위기를 한껏 돋구곤 한다.
2011년 11월 볼프스부르크와의 분데스리가 홈 경기 때 펼친 '죽을 때까지 도르트문트(Borussia Dortmund - bis in den Tod!)'라는 주제의 해골 카드 섹션과, 2013년 4월 말라가와의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 당시 보여준 '잃어버린 컵을 찾아서(Auf den Spuren des verlorenen Henkelpotts)'라는 연출은 전세계 축구팬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챔스 트로피를 뒤에 두고 쌍안경을 든 거대한 인물 걸개가 올라오는 이 장면은 도르트문트 팬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 봤을 명장면이다.
영국 정론지 타임스에서는 이러한 이유들에 근거해 '세계 최고의 구장 TOP 10' 중 베스트팔렌슈타디온을 당당 1위로 꼽았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곳을 찾으면 절로 도르트문트를 응원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내가 베스트팔렌슈타디온에서 직접 본 경기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바로 2005년 3월에 열린 도르트문트와 슈투트가르트의 분데스리가 25라운드 경기였다.
당시 양팀의 에이스는 분데스리가 넘버원 플레이메이커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토마스 로시츠키(도르트문트)와 알렉산더 흘렙(슈투트가르트)였다. 경기는 원정팀 슈투트가르트의 2-0 완승으로 마무리됐지만 정작 내 눈길을 끈 인물은 로시츠키였다. 경기장에서 본 로시츠키는 마치 구장 위에서 그라운드 전체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적재적소에 패스를 공급해주었다.
흘렙 역시 화려한 드리블을 바탕으로 슈투트가르트의 공격을 이끌었다. 결국 흘렙은 경기 종료 직전 페널티킥을 유도해내며 승부에 쐐기를 박는 골을 만들어냈다. 도르트문트 선수들은 비록 승부에선 졌지만 베테랑 장신 공격수 얀 콜러를 중심으로 '남쪽 스탠드'에 다가가 홈 팬들에게 고마움을 표했고, 팬들 역시 선수들을 박수로 격려했다.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인상 깊은 장면이다.
2014년 4월 2일은 베스트팔렌슈타디온이 신축된 지 40년째 되는 날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도르트문트 감독 위르겐 클롭은 "이곳이 바로 나의 집이다. 이곳에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선수 출입 터널은 마치 자궁을 연상시킬 정도로 매우 좁고 협소하다. 하지만 이곳을 통과하면 환희로 가득한 거대한 세계를 만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구장이다"라고 설명했다.
도르트문트 구단주 라인하르트 라우발 역시 "이 구장은 도르트문트에게 상당히 감성적인 장소이다. 우리는 독일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크고 뜨거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구장을 가지고 있다.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도르트문트는 분데스리가에서 바이에른을 대적할 1순위로 꼽히는 구단이다. 하지만 구단 명성에 걸맞지 않게 성적은 기복이 심한 편이다. 인생에 비유하자면 굴곡진 인생을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르트문트가 아직까지도 바이에른의 대항마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끝까지 팀에 충성을 맹세하는 팬들에 있다. 구단이 파산 위기에 직면했을 때도 도르트문트 팬들은 팀을 포기하지 않았다. 베스트팔렌슈타디온을 떠올리면 구장의 가치는 최첨단 설비나 안락한 시설이 아닌, 진정한 팬들에게 달려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독일엔 '아름다운 주말 티켓(Schönes-Wochenende-Ticket)'이라는 주말 전용 교통 티켓이 있다. 이 티켓을 가지고 최대 5명의 인원이 토요일이나 일요일 하루 단돈 40유로로 국철을 통해 독일 전역을 여행할 수 있다. 고속철도를 이용할 수 없기에 자주 환승해야 한다는 약간의 불편함이 있지만, 많은 축구 팬들은 이 티켓을 통해 단체로 응원가를 부르고 맥주를 마시며 여유롭게 원정 기차 여행을 떠나곤 한다.
글 - 김현민 (골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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