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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직관
by 오늘의 축구 Oct 09. 2017

도르트문트의 매력에 취한 날

독일 도르트문트, 지그날 이두나 파크


2013년 4월의 어느 날로 기억한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라는 팀이 내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됐다. 계기는 이러하다. 


당시 위르겐 클롭 감독이 이끄는 도르트문트는 분데스리가를 넘어 유럽 무대에 도전하는 '핫'한 팀이었다. 그들은 용감하게 챔피언스리그 4강까지 진출했고, 주제 무리뉴 감독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와 만났다.


많은 이들이 레알의 완승을 점쳤는데, 도르트문트는 놀랍게도 모두의 예상을 깨고 대승을 거뒀다. 지그날 이두나 파크에서 열린 1차전에서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는 홀로 4골을 터뜨렸고, 당대 최강팀 중 하나인 레알의 자존심은 가루가 됐다. 그때 페널티 박스 안에서 페페를 농락한 레반도프스키의 '발바닥 드리블'은 하나의 상징처럼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아, 이 팀 참 매력 있구나!


레알에게 무려 4골을 넣은 레반도프스키


그로부터 4년 여가 흐른 2017년 9월. 내게 영광스럽게도 그 도르트문트의 경기를 현장에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비록 탈 인간계 선수가 되어버린 레반도프스키가 팀을 떠나는 등 스쿼드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팀 중 하나인 '꿀벌 군단'과 '노란 장벽'을 직접 보고 나니. 예상보다 더 거대하고 강렬한 장면들이 새롭게 내 머리속을 채워버리고 말았다.


그 중 몇 가지 장면들을 다시 한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곳에 되새겨본다.



#장면1 - 12개의 계단과 진정한 사랑


도르트문트 홈경기 관람에 앞서 나는 스타디움 투어에 참여했다. 유럽 명문 구단들은 대부분 이러한 스타디움 투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전문 가이드로부터 구장 곳곳에 대한 설명을 듣는 이 투어 프로그램은 팀과 구장에 대한 이해도와 흥미를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코스 요리로 치면 입맛을 돋우는 전채 요리랄까. 


BVB의 스타디움 투어는 선수들이 구단 버스에서 내려 경기장에 입장하는 동선을 그대로 좇는다. 경기 당일, 양 팀 선수들이 라커룸으로 들어가기 위해 마주하게 되는 서측 출입문 벽에는 자랑스레 '마이스터 샬레(분데스리가 우승 방패)'를 들고 있는 도르트문트 레전드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양 갈래로 나뉜 계단을 내려가 온통 노란색으로 가득 찬 믹스트존과 두근두근 긴장감을 주는 입장 터널을 지나면, 넓고 푸른 피치와 엄청난 규모의 관중석을 마주하게 된다. 탄식에 가까운 혼잣말과 함께.


BVB 스타디움 투어 맛보기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역시나 매 경기 '노란 장벽'이 들어서는 남쪽 스탠드 '쥐트리뷰네(Die Südtribüne)'. 어두운 회색빛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삭막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구역은 경기가 있는 날이면 예외 없이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위용을 과시한다. 


쥐트리뷰네 중에서도 메인이라 할 수 있는 아래 절반 구역은 아예 좌석이 없다. 심지어 좌석이 있는 위쪽 스탠드도 2만 5천여 명의 서포터들이 가득차면, 모두 앉을 새 없이 90분 내내 선 채로 활기차게 응원을 펼친다. 노란 장벽의 일원이 되기 위해 몇 년씩 기다려야 시즌권 구입에 성공한다고 하니, 그 열정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만하다. 그곳에 서서 경기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노란 장벽의 함성이 들려오는 양 전율이 온몸을 덮친다.


매 경기 회색빛 콘크리트 스탠드가 노란 옷을 갈아 입는다


가이드가 본인도 스탠드 한켠에 자기 자리가 있다며 '돌부심' 한껏 뽐내면서 들려준 지그날 이두나 파크에 대한 깨알 같은 디테일들도 아주 흥미로웠다. 이런 배경 지식은 클럽의 역사와 정체성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열리는 경기를 관전할 때 소소한 재미를 더해준다.


예를 들어 선수들이 경기장에 도착해 락커룸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치는 통로 계단엔 작지만 신경 쓰이는 비밀이 하나 숨어있다고 한다. 홈팀과 원정팀이 좌우 각각 다른 방향으로 계단을 내려가도록 동선이 설계되어 있는데, 홈팀 통로의 계단은 12개, 원정팀 통로의 계단은 13개다. 유럽에서 13은 '13일의 금요일'처럼 불길한 숫자이니, 경기를 앞둔 원정팀 선수들에게 굳이 계단 하나를 더 둔 이유가 그야말로 깨알 같다.


똘끼 넘치기로 유럽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바이에른 뮌헨의 토마스 뮐러는 바로 이 원정팀 통로의 계단이 13개라는 걸 알고 마지막 계단에서 점프를 뛰곤 한단다. 정작 본인 등번호도 13번이면서. 역시 재밌는 캐릭터다.


벤치에도 홈팀을 위한 배려가 숨어 있다. 도르트문트를 상징하는 표어 '진정한 사랑(Echte Liebe)'은 오직 홈팀 벤치 의자에만 쓰여 있다. 도르트문트의 뿌리, 특별한 정신력을 고취시킬 수 있는 이 표어가 오직 홈팀 선수들에게만 영향을 끼치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것이다. 시즌 중반, 추운 겨울이 되면 이 가죽 시트는 더 극명한 사랑의 온도차를 드러낸다. 홈 팀 벤치에만 전기 열선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겨울이되면 더 극명해지는 '진정한 사랑'의 차이



#장면2 - 안녕, 마르코!


스타디움 투어를 마치고 팬샵에 들러 잠시 지름신을 영접한 뒤, 본격적인 경기 관람을 위해 '로테 에르데 클럽(Rote Erde Club)'이란 이름의 VIP 박스로 향했다. (로테 에르데는 1937년부터 1974년까지 도르트문트 홈구장으로 쓰였던 구장의 이름으로, 현재는 도르트문트 II팀이 사용하고 있다) 


다양한 먹거리와 쇼파가 갖춰진 프라이빗한 공간, 그리고 탁 트인 발코니에서 경기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스카이 박스. PUMA, KONAMI 등 클럽의 오피셜 스폰서 기업들에게 제공되는 공간인데, 무려 도르트문트라는 매력적인 팀의 경기를 이런 명당에서 지켜볼 수 있다니 정말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창 발코니에서 경기 전 차오르는 노란 물결과 노을을 보며 분위기에 취해있을 무렵, 룸 안이 조금 소란스럽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생각하며 들여다보니 일행이 누군가에게 사인을 요청하고 있었다. '유명인인가? 혹시 선수?' 얼굴을 확인한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마르코 로이스였다.


아아, 개간로!


지난 시즌 말 큰 부상을 당한 로이스는 재활 중이었다. 복귀 예정 시기는 2018년 초. 이날 그는 여자친구와 함께 경기를 보기 위해 VIP 박스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 운 좋게도 한국에서 날아온 나도 함께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나는 그의 모습을 계속해서 휴대폰 카메라에 담았다. 용기 내 다가가 함께 사진을 찍고, 사인도 받았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소년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신난 나와는 달리 로이스는 다소 심각해 보였다. 발코니 뒷자리에 앉은 그는 초조한 모습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팀이 골을 넣으면 함께 기뻐했지만, 그 외에는 다소 우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마 직접 뛰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었으리라.


한국에 돌아와 로이스의 인터뷰를 읽었다. "전 재산을 주고라도 부상을 피하고 싶다" 심경을 밝힌 기사였다. 그가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그라운드에 서길, 또 앞으로 부상 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활약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장면3 - You'll Never Walk Alone


킥오프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경기장은 점점 노란색으로 물들어 갔다. 독일에서 가장 큰 축구장의 8만 석이 넘는 좌석이 서서히 채워지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큰 웅성거림에 불과했던 관중들의 목소리도 점점 하나의 목소리로 합쳐졌고, 이내 갖가지 응원 구호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북쪽 스탠드 한켠에 자리 잡은 상대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원정팬들도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자 안간힘을 쓰며 응원을 펼쳤지만, 쪽수 앞에 장사 없었다. 남쪽 스탠드에 거대하게 형성된 노란 장벽은 이미 무엇이든 집어삼킬 기세로 꿀렁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턴가, 익숙한 선율이 들려왔다. 


"When you walk through the storm, hold your head up high"

(폭풍 속을 걸어갈 때 당당히 고개를 들고 가세요)


'You'll Never Walk Alone' 이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리버풀의 응원가로 유명한 이 노래가 도르트문트 지지자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내 귀를 파고들었다.


지그날 이두나 파크에 울려 퍼지는 YNWA


노랗고 검은 머플러를 머리 위에 높이 치켜든 팬들이 목청이 터져라 이 노래를 불렀다. 온몸의 솜털이 바싹 곤두섰다. 그 느낌은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축구의 천국에서 울려 퍼지는 선율이 있다면 아마 내가 경험한 그 순간, 그 음악일 것이다.


특히 압권은 마지막. 반주가 사라지며 육성만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당신은 혼자 걷지 않는다.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뒤이어 팬들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보루시아, 보루시아, 보루시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장면4 - 여섯 번의 네임콜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에게 유럽 축구 직관은 흔한 기회가 아니다. 오죽하면 유럽 축구 직관이 '버킷 리스트'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어렵게 찾은 경기가 지리한 공방전만 이어지다 무승부로 끝나는 등 시시해버리면, 사람 마음이란 게 또 아쉬움을 싹 틔우게 마련이다.


다행히 이날 도르트문트의 경기는 내용도 결과도 완벽했다.


이번 시즌 영입된 막시밀리안 필립이 두 골을 먼저 터뜨리며 승기를 잡았고, 이어 에이스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이 잇따라 세 번 골망을 가르며 해트트릭을 완성했다. 피날레는 율리안 바이글. 먼 거리에서 발등에 얹히는 시원한 발리 슈팅을 시도해 성공시켰다. 그동안 원정팀 묀헨글라트바흐는 단 한 골을 만회하는데 그쳤다. 


많은 골 수에 비례해 내 눈도 호강했다. 도르트문트는 높은 수준의 팀웍과 개인 기술을 선보이며 경기를 주도했고, 골이 터질 때마다 들썩이는 노란 장벽은 나를 전율케 했다. 특히, 골이 터질 때마다 모두가 하나되어 외치는 '네임콜'은 압권이었다. 피를 토하는 듯한 장내 아나운서의 외침이 인상적인 세리에 A의 네임콜이 세계 최고인 줄 알았는데, 현장감 버프를 받은 지그날 이두나 파크 역시 그 못지않았다. 아직도 그 울림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율리안) 바이글!
(율리안) 바이글!
(율리안) 바이글!
노란 장벽은 골이 터질 때마다 들썩였다
갑자기 골을 터뜨리는 바람에 겨우 잡은 바이글 골 직캠


4년 전 레반도프스키의 골 장면이 나로 하여금 도르트문트라는 팀에 흥미를 가지게 한 계기라면, 이번 지그날 이두나 파크 직관은 이 팀의 매력에 푹 빠지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 경기장, 이 분위기를 직접 경험해본 것은 앞으로 내 인생에 큰 자랑이 될 듯하다.


마지막으로, 영국 언론 <타임스>에서 '유럽 최고의 구장 TOP 10' 중 첫 번째로 지그날 이두나 파크를 꼽으며 덧붙인 설명을 옮긴다.


모든 유럽의 컵 대회 결승전은
이 경기장에서 치뤄져야 한다.
이 경기장의 분위기는 유럽 최고다!


글 - 김정희 (오늘의 축구)

사진·영상 - 오늘의 축구, UEFA.tv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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