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치매 환자입니다

by 채수아

지난주 토요일, 엄마에게 다녀왔습니다. 엄마는 얼굴이 희고 고운 예쁜 할머니입니다. 원래 지으려던 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아기 얼굴이 너무나 하얘서 외할아버지께서 흰 백, 착할 순, '백순'으로 출생신고를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엄마는 부유한 집의 딸이었습니다. 피난 내려온 사람들을 거두어 먹이고, 동네 거지들을 먹이고, 집 없는 먼 친척을 한 집에 살게 한, 그런 부잣집의 딸로 태어났지요. 하지만 엄마의 학력은 국민학교 졸업입니다. 중학교 입시에서 계속 떨어지는 큰 외삼촌이 있어 외할아버지는 공부 잘했던 딸을 중학교에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공부 잘하고 그림 잘 그리던 엄마는, 그래서 평생 지적 열등감을 안고 사셨을 겁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남자와 방학을 이용해 맞선을 본 후 아버지와 결혼한 것도, 아버지의 잘 생긴 외모에 보태어 아버지의 지적인 모습에 반했을 거라 짐작합니다.


중등 수학과 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던 아버지는, 그 당시 초등 교사의 숫자가 모자라는 기현상으로 인해 안성 고삼 국민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첫아이를 낳고 시어머님 방에서 살고 있던 엄마는, 아버지가 발령이 나자마자 아기를 데리고 안성으로 올라왔겠지요. 그 첫아들이 지금 치매 엄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5년 초등 교사 이후 중등교사로 이동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지만, 교육청에 초등 교사로 살겠다는 본인 뜻을 밝히고 중등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가난했던 그 시절에 아버지의 열정을 더 어린 학생들과 함께해야겠다고 판단하셨나 봅니다. 아버지의 절친이셨던 분은 수원에 있는 수원여고 국어교사로 학교를 옮겼습니다


아버지께서 용인 포곡 국민학교에 근무하실 때, 셋째이면서 큰딸인 제가 태어났습니다. 위로 아들 둘을 두었던 엄마는, 딸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가난한 살림에도 딸의 머리를 늘 예쁘게 땋고, 그에 어울리는 원피스를 입히고, 예쁜 구두를 신겼습니다. 그런 여자아이여서 동네 언니들이 인형처럼 예뻐했었고, 수원으로 이사를 왔던 다섯 살에는, 동네에 혼자 살던 아줌마가 저를 딸처럼 예뻐하며 데리고 다녔습니다. 저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제 인생 첫 기억이 저를 예뻐하던 언니들과 놀던 거였고, 다섯 살 때 만난 아줌마가 사주었던 볼레로 원피스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초등 교사로 근무할 때는 교사 월급이 많은 편이었지만, 아버지 때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늘 부업을 하셨고, 집에서 일을 하는 모습을 전 오랫동안 보고 자랐지요. 눈썹 뜨기(가짜 눈썹의 시초) 뜨개질, 전자제품 팔기(열 개를 팔면 하나를 주는 방식) 재봉틀로 한복을 만드는 게 엄마의 마지막 부업이었지요. 그래서 엄마는 눈이 나빠져 돋보기안경을 끼고 재봉틀질을 하곤 했습니다. 아버지 회갑 때 입었던 여자들 한복은 다 엄마가 만드신 깨끼 한복이었습니다


엄마는 교사의 아내로서 참 좋은 분이셨습니다. 밥을 자주 굶는 제자들을 일부러 집으로 심부름을 보내면, 엄마는 아이에게 따순 밥을 해먹이고, 아이가 밥을 먹는 동안 아이의 구멍 난 양말을 꿰매주셨다고 합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주 우리 집에 왔을 제자들은 우리의 친척 비슷했지요. 자라면서 늘 집에 오는 제자들을 보고 자랐으니까요. 나와 놀아주던 언니들과 오빠들, 월남전에서 받아온 내셔널 17인치 흑백 Tv를 갖고 집으로 갔던 한 오빠는, 선생님댁에 갖다 드리라며 아버님이 호통을 치셨다지요. 덕분에 초등 3학년 때 저는 티브이가 있는 집의 딸이 되었습니다. 동네에 티브이가 있던 대궐처럼 큰 집이 몇 있었지만, 그 집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으니, 대문이 활짝 열린 작은 우리 집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들었지요. 전 그때 알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처음으로 부잣집 딸이 된 느낌이었으니까요


어제는 우리 집에 티브이를 갖다 준 아버지의 첫 제자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엄마가 오빠를 기억할 가능성이 있을 때 다녀가시라고, 오빠는 엄마에게 특별한 아들이었다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제가 새벽에 본 오빠의 문자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규숙 누이

늘 생각만 하고 아무 연락도 못해서 미안해


어머니도

못 찾아뵈었는데

치매라니


​당장 찾아뵈야겠어요


갈 때

연락할게​




평생 아버지를 찾아뵙던 오빠는 아버지 장례식 이후에도 계속 저와 연락을 하고 지냅니다. 시인이며 목사님이셔서 사 남매 중 저와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네요. 오빠도 할아버지가 되었고, 제 나이도 예순이니,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습니다. 아버지 옆에서 팔을 괴고 함께 책을 읽던 꼬마 여자 아이가, 이렇게 글을 쓰는 중년의 여성으로 살지 아버지는 아셨을까요?


중풍으로 4년을 누워계시던 아버지를 돌아가신 날까지 굳건하게 보살피던 엄마가, 이제는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치매 4급 환자입니다. 착하게 사셔서 1등 효자인 큰아들과 밝고 선한 요양보호사님을 만난 것 같습니다. 효자인 작은 오빠와 효녀인 여동생도 엄마를 살뜰히 보살핍니다. '사람답게 살라'고 자주 하신 아버지 말씀을, 저희 형제들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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