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형님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남편 입을 통해서이다. 형수가 자기에게 어머니를 절대 모시지 않을 거라고 했으니, 고생 많으셨던 어머니를 자기가 모시고 살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즉시, 결혼 후 바로 모시고 살겠다고 했다.
2.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작은 전셋집에서 세 사람의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머님은 퇴근한 내게 당신을 평생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다짐을 받곤 하셨다.
3. 명절을 우리 집에서 지내다가 형님 네로 옮겨갔다. 아무래도 집이 작아서 불편하니, 30평대 아파트에 사는 큰아들 집에서 하라고 어머님이 엄명을 내리신 것이다.
4. 형님네서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어머님의 막말을 들었다. 큰 조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는데, 수학 문제를 풀다가 모르는 게 나오자, 자기 엄마에게 물었다. 그 순간 우리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니 에미가 그걸 알겠니? 핵교 선생인 니 작은엄마가 알겠지."
난 형님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형님도 알아요,라고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5. 나는 가끔 형님과 데이트를 했다. 내 차로 모시고 맛난 음식점에 가서 밥도 사드리고, 차도 사드렸다. 형님과 속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동서, 나는 동서가 시집오기 전에 무척 긴장했었어 나는 대학을 못 나온 며느리이고, 동서는 대학 나온 선생님이잖아. 어머님이 결혼 전에 내 앞에서 엄청 떠벌리셨거든. 나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동서에게도 무시당하고 살지 않을까 좀 겁이 났었어. 동서가 나를 대하는 걸 보고 정말 고마웠어. 배운 티 안 내고, 나한테 모르는 걸 물어봐 줘서."
6. 내가 결혼 후 2~3년쯤인가, 정신적으로 심하게 시달리며 살 때 형님께 전화를 걸었다.
"형님, 제가 지금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있어요. 매일 시달리다 보니 너무 힘들어요. 이러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할 것 같아요. 좀 도와주세요. 여름방학 한 달만 어머님을 모셔주세요. 그럼 제가 기도하면서 평화를 찾아볼게요"
형님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동서, 나는 하루도 못 모셔. 어머님이 집에 오시면 나는 수영도 못 가. 남편이 내 곁으로 오지도 않아. 나는 불편해서 하루도 못 살아."
나는 그 이후 '포기'라는 걸 했고, 또 견디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결혼 6년 차, 어머님 증세는 날로 심해졌다. 나는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어머님은 예쁜 손녀딸에 든든한 효자 막내아들과 함께 사시니, 얼마나 좋으셨겠는가! 남편도 어머니와 따로 살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아주버님을 만나 울면서 하소연했다.
"아주버님, 저 좀 도와주세요. 제 심리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나는 엉엉 울면서 아주버님 차 안에서 말씀드렸다. 지금은 없어진 수원 원천유원지 부근이었다. 아주버님은 아주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셨다.
"제수씨, 정말 죄송합니다. 얼마나 힘드실지 제가 왜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 와이프에게는 절대 기대하지 마세요. 어머니, '어'자만 나와도 학을 띠는 사람이에요.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해 보겠습니다."
아주버님은 급히 서두르셨다. 그 당시 이혼한 시누님과 어머님을 함께 살도록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제서야 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어머님은 옆 동네에 살던 시누님 집에서 매일 우리 집으로 출근을 하셨지만, 분명 예전과는 달랐다. 나도 어머님도 뭔가 부드러운 기류를 느끼고 있었다.
7. 시누님네 집에서 2~3년 계시다가 어머님이 다시 우리 집으로 오시게 되었다. 육아휴직을 끝내고 학교로 복직하는 그 시점에 어머님은 손주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우리 집에 들어와 살고 싶다고, 내 새끼를 남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하셨다. 순간 난 어지럼증을 느꼈던 것 같다. 아이는 옆집 엄마에게 이미 부탁을 해놓은 상태였다. 나는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말씀드렸고, 형님께 전화를 해서 상황을 전했다. 형님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나는 다음날 집에 오신 어머님께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님이 약속했던 2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머님은 계속 우리 집에 10년 정도를 더 사셨다. 내가 만성피로증후군으로 병 휴직을 할 때까지.
8. 분가 후에 어머님과 잘 지내면서도, 늘 마음 안에 죄책감 같은 것이 있었다. 형님께 내 마음을 표현하니, 어머님이 연세 드시면 자기가 책임지고 모시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은 두 '아들이 결혼을 하면'으로 바뀌었다. 둘째 아들이 '독신주의자'라는 걸 시댁 식구 모두가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9. 어머님이 말기 암으로 입원하신 후, 형님 부부와 우리 부부는 거의 매일 어머님 병실에 갔다. 직장에 다니는 시누님은 며칠에 한 번 정도. 남편은 출근하기 전에 들렀다가 퇴근 후에 또 들렀고, 나는 주로 오전에 병실을 향했다. 형님은 교회 활동을 한 후 아주버님과 함께 늘 3시 반에서 4시 사이에 병원에 왔다 그 규칙은 어머님이 돌아가시는 날까지 이어졌다. 의사 선생님이 돌아가실 날을 며칠 전에 미리 말씀해 주셨건만. 돌아가신 그날, 아침 일찍 어머님께 가서 하루 종일 있었던 우리 부부는, 마지막 날까지 시간 맞추어 온 형님 부부를 보고 가슴이 좀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10.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6년이 지났다 삼우제 때의 '뭐든지 각자 따로'라는 큰며느리 말에 우리 시댁 삼 남매는 각자 따로 움직여야 했다. 앞으로 형님 댁에 갈 일이 있을까? 우리는 그해 추석, 시누님 가족과 함께 시어머님 납골묘에 함께 다녀왔다. 그리고 아직까지 형님 부부를 만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