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쟁이

by 채수아

내가 참 많이도 변했다. 친정에 가자마자 나는 오빠들에게 형님의 만행에 대해 고자질을 하기 시작했다. 오빠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정말 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맞장구를 쳐주는 오빠들과 올케언니가 있어 든든했는지, 그날은 내가 좀 붕 떠있던 것 같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바로 시어머님을 힘들게 모시면서도 나는 아주 친했던 동료 교사와 대학 절친 이외에는 내 속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물론 친정에 가서도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시어머님에 대한, 또는 남편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내 자존심 때문이었다. 공부 잘하고, 순종적이고, 부모님의 자랑이었던 나, 그리고 학부형이나 학생들에게 인기짱이었던 나, 어느 모임에 가서나 인정받고 인기가 많았던 나, 그런 나의 초라한 변신이 난 견디기 어려웠다. 집에서는 구박받는, 상처 많은 며느리였지만, 밖에 나가서는 아닌 척 연극을 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 현실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심한 홀대를 받는다는 내 인생 첫 경험이 너무나도 아프고 쓰렸다. 특히 나를 시집보내며 '온실 속 화초로 키워서 내보내기가 겁난다'고 하셨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단칸방에서 삼 남매를 홀로 키우셨던 어머님, 자식과 함께 살고 싶어 하셨던 어머님, 그 어머님을 모시고 싶어 했던 내 남편, 죽어도 어머니를 못 모시겠다는 큰며느리, 그 안에서 나는 빛을 잃어버린 아이 같았다. 사람 좋아하고, 특히 어르신들과 아이들을 좋아하던 나였기에 나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평생 행복하게 살아갈 줄 알았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나는 시집살이가 뭔지도 모른 채, 진정한 휴머니스트의 삶이라 착각하고 시집살이를 선뜻 시작한 것이다.


어머님의 막말과 언어폭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상대방이 가장 아파할 말을 동물적 감각으로 기막히게 알아차리는 분으로 보였다. 딸 셋을 낳은 여동생에게는 '아들도 못 낳은 년'이라는 말로 대못을 박았고, 교사 출신의 손아래 올케에게는 "내가 교사를 며느리로 얻으면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로 입을 막으셨다. 들려오는 어머님의 막말 시리즈는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내가 들었던 최악의 막말은 "너한테 배우는 학생들이 참으로 불쌍하다"였다. 제자들과 계속 만나고 행사 때 서로 챙겨주다 보니, 내 제자들도 어머님 장례식에 왔다. 나이가 마흔이 넘은 제자들을 보며, 어머님께 마음속으로 말씀드렸다


"아머니, 저 제자들 잘 키웠죠?"


아머님에 대한 상처가 오래전에 다 치유되고 사랑만 남아있었기에 난 장난치듯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내게 17년은 인고의 세월이었다. 나의 자존심은 조금씩 꺾였고, 시어머님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들 모임에서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 17년을 모신 후 건강을 잃고 분가를 했을 때, 큰 오빠는 나보다도 시어머님 걱정을 했다. 내가 많은 걸 숨기고 살았기에,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머님은 보란 듯이 인격 높으신 어르신으로 변하셔서 '기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셨고, 난 자존심과 부끄러움이 많이 녹아내려 왕 수다쟁이가 되었다. 그동안 sns에 많은 글을 올리면서도 내가 절대 건드리지 않았던 '시어머님과 얽힌 아픈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그건 내 사랑하는 어머님의 삶이 '위대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내 아픔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당신도

마음이 덜 아프길...


우리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