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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Feb 08. 2024

36.5라는 숫자

36.5 Kg, 우리 시어머님의 몸무게였다. 뵐 때마다 너무나 작아진 어머님이 안쓰러웠다. 키가 나보다 크시고, 얼굴도 꽤 미인이셨던 분이셨는데, 평생 호리호리한 예쁜 몸매의 어머님이셨는데 말이다.


시외 할머님이 아흔이 넘어 돌아가셨고, 늘 건강 체질이셨던 어머니셨기에 난 백 살까지는 사실 줄 알았다.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도 우리 집에 반찬을 싸다 주신 분이셨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다. 우리 어머니께서 암 환자가 되시다니...


병원에 계신 어머님과 대화를 하는 중에 어머님의 마지막 여행이 참 좋았다는 말씀을 들었다. 지금 회사원인 우리 큰딸과 둘이서 떠난 '무창포'는 어머님 고향이시고, 수원에 올라오기 전까지 사셨던 곳이었다. 그곳이 너무 가고 싶어서 여행지로 정했다고 했다. 어머님의 뿌리, 그리고 어머님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인 나의 큰딸! 어머님은 말씀하시며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다.


난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첫날부터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 세월이 자그마치 17년이었다. 막내아들인 남편과 둘이 살고 계셨던 작은 전셋집에 내가 들어가 살게 되었다. 남편이 원했고, 나도 남편의 말에 바로 오케이를 했다. 사람에 대한 상처와 두려움이 전혀 없던 나는,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고 그리 말했던 것이다. 내 말을 듣고 나의 부모님은 잘했다고, 어머님을 잘 모시고 살라고 하셨다.


어머님과 남편과 셋이 결혼을 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부가 내게 하신 말씀이 있다.


"앞으로 힘드시겠어요"


맘씨 착하신 고모부가 내게 하신 그 말의 의미를 난 조금 더 지나서 알게 되었다.  왜 그리 큰며느리가 어머니를 두려워하는지,  결혼 안 한 시동생에게 어머니를 부탁했는지 알게 되었다.


몹시 힘든 세월이었다. 어머님의 힘들었던 삶을 떠올리며 '측은지심'으로 버티기에 역부족이었다. 난 주일 미사 시간이면 한 시간 내내 울었다. 어머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내 마음 그릇을 좀 넓혀달라고 기도했다. 난 지쳐갔고, 몸이 계속 아팠다. 건강했던 내가 자주 병가를 내는 교사가 되었다. 가끔 생각했다.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결혼 후 열다섯 번 정도 입원을 했다. 백혈구 수치가 너무 높아 백혈병동 무균실에도 입원한 적도 있었다.  남편의 아픈 사랑, 내가 낳은 삼 남매를 지극히 사랑하셨던 어머니, 그리고 힘겹게 어머니를 사랑했던 막내며느리!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았던 가정이었다. 그 속에서 내 몸은 자꾸 신호를 보냈다.  몸이 가장 정직하다는 걸 그땐 몰랐었다. 무조건 견디라고 나를 다그쳤다. 10여 년 전 몸이 망가져 병가를 내고 학교를 쉬고 있을 때, 나를 진료하시던 대학병원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선생님, 자신을 사랑하세요. 학대하지 마세요. 큰며느리인 형님은 자기 가족과 잘 살고 있잖아요?  왜 내 몫이라는 사실에 사로잡혀 있나요? 이렇게 살다가는 선생님 몸이 아주 망가져 큰일이 날 수도 있어요. 그동안 아픈 아내, 아픈 엄마를 보고 살았던 가족의 힘듦도 생각하세요. 제가 약도 드리고 치료해 드리겠지만, 분가가 최고의 약이 될 겁니다."


새댁이었던 30대 젊은 여의사는 눈물을 흘리며 내게 말했다. 그 이후 어머님과 우리 가족은 떨어져 살게 되었고, 어머님도 나도 우리 가족 모두 아픈 상처가 되었다. 나는 한동안 죄의식에 사로잡혀 괴로워했다.  그리고 나는 마음을 추스른 후 바로 어머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어머님은 기적처럼 온화한 분으로 바뀌셨고, 그전에는 내가 들을 수 없었던 '고맙다'는 말씀을 만날 때마다, 전화를 드릴 때마다 하셨다. 우리는 알았다. 우리가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있는지.


잘 드시고, 몸무게도 조금 늘리시고, 건강이 좋아지시면, 봄에 무창포로 여행을 가자고 어머님께 말씀드렸다. 그 말이 약이 되었는지, 어머님 컨디션이 좀 나아지셨다. 이 터널을 잘 지나 어머님 건강이 회복되시길 간절히 빌고 또 빌었지만, 어머님은 그리움만 남기시고 먼 곳으로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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