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충청도 어르신들의 맏이 사랑은 매우 각별하다. 남편이 버팀목이 아닌, 돌봐야 할 존재였던 어머님께 맏아들은 남편이자, 애인이자, 애지중지 금쪽 아들이었다. 다른 두 자식은 그 차별을 견디며 자라야 했고, 딸이었던 우리 시누님의 괴로움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 마음이 자식들 결혼 이후에도 이어져서, 큰며느리가 당신을 안 모신다고 내게 서운함을 많이 내비치셨음에도, 큰아들 부부를 높이 세워야만 집안이 바로 선다는 믿음으로 사신 어머님! 그래서 그런 시어머님과 결혼 시작부터 함께 살았던 나로서는, 17년을 모시고 살면서 서운하고 속상한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중요한 일은 따로 사는 맏이 부부와 의논하시고, 우리 부부는 나중에 통보받는 식이었다.
지금 시각이 새벽 4시 5분! 그 새벽도 비슷한 시각이었다. 남편과 함께 집에 돌아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날밤을 샜던 날이었다.
"형님, 세상에나!
형님이 고모부님 밥을
떠먹여 준다면서요?
시골에서 난리래요.
형님에게 효부상 표창을
주어야 한다고."
그 말을 들은 우리 형님은 당연한 일인데 뭘 그러느냐, 하는 여유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란 우리 아버님의 누님(아버님이 아기였을 때 업고 있다가 아기를 놓쳐, 그때부터 장애가 생겼다고 한다)과 그분의 아들과 며느리와 딸이었다. 고모님은 우리 어머님에게나 가족들을 살갑게 대해주시던 고마운 어르신이었다.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나와 남편의 표정은 점점 어색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마음을 숨기려 애쓰면서 함께 있다가, 새벽에 택시를 타고 수원으로 향하는 그 안에서 침묵을 깬 건 나였다.
"형님,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버님이 형님 댁에 계시다니요?"
형님은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 속상해 죽겠어. 어머님이 거짓말로 소문을 다 내놓아서 내가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 말을 듣자마자 아주버님이 거드셨다.
"야! 그건 어머니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그랬다. 평생 시골에서 홀로 사셨던 아버님이 어느새 그들의 칭찬거리가 되고 있었다. 결혼 이후, 억세고 강하고 심하게 부정적이셨던 시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면, 시골에 홀로 계시는 아버님이 나의 가장 가슴 아픈 손가락이었다. 시댁 모든 사람들은 아버님이 혼자 사시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 의식으로는 이해불가의 일이었고, 내가 시어머님 시집살이에 조금의 여유가 생겼을 때, 나는 비로소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아주버님, 제가 아버님을 모셔야겠어요."
아주버님과 형님 앞에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내 말을 듣자마자 형님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서, 그건 안될 말이야. 평생 시골에서 사셨던 분인데, 앞으로도 그렇게 사셔야지, 어떻게 수원으로 모시고 올 생각을 해?"
20여 년 전의 일인데도 그 장면이 너무나 생생해 신기할 정도이다. 듣고 있던 아주버님은, '나이 들면 자식이 고향'이라고 하시며 형님의 말에 단호하게 맞받아치셨다. 그걸 시작으로 나는 계획을 세워 착착 움직여나갔다. 그 당시 우리는 거실에 햇볕도 안 드는 작은 전셋집에서 살다가 결혼 6년 차에 방 세 개짜리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를 한 상태였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각방을 쓰셔야 하는 관계(보통의 부부 관계가 아닌, 차마 버릴 수 없어서 건사했던 어머님 인생의 웬수, 화상... 이건 어머님 표현이다)였고, 내 아이가 둘 있었고, 남편이 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던 어머님의 동네 친구들이 있어서, 우리는 그곳을 떠나야 아버님을 모실 수 있었다. 하늘이 도우사, 1층에 방이 네 개가 있는, 마음에 쏙 드는 아파트를 계약할 수 있게 되었다. 삼성 부장으로 근무하던 분이 해외 발령이 났다고 시세보다 싸게 전세를 내놓은 것이다. 어머님과 남편과 함께 집을 둘러본 후에 내 가슴은 벅차올랐다. 이제 드디어 아버님이 가족과 함께 사실 수 있구나! 너무나 좋아 내 마음은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에미야! 난 평생 '남의집살이"를 한 사람이라, 이제는 전세 싫다. 이제 처음 내 집(어머니는 우리가 결혼해서 마련한 집을 항상 그렇게 표현하셨다)이 생겨서 살고 있는데, 정말 전세는 싫어."
지금에서야 다른 방법이 떠오른다. 우리 부부가 어머니를 모시고 작은 전셋집에 살 때, 넓은 평수의 브랜드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아주버님께 그 부분을 의논해 봐도 좋았을걸, 왜 그 당시는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랬으면 내가 계획했던 일이 빨리 이루어졌을 텐데, 오로지 우리의 몫이라고만 생각했다. 어머님의 심한 반대로 인해 우리가 택한 방법은, 넓은 아파트를 분양받는 것이었다. 그 사이 우리에게는 셋째 아이까지 생겼다. 2차 특별 분양이었기에 우리가 층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아버님께 좋으시도록 저층을 선택했고, 나는 입주할 꿈을 꾸며 행복해했다.
'퇴근 후에는 매일 아버님을 휠체어에 태우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야지. 아버님 방에서 아버님과 스케치북으로 대화를 해야지. '쎄쎄쎄'도 해야지.'
아버님을 만날 때면 방에서 둘이 했던 놀이를 떠올리며 가슴이 설렜다. 그 사이 아버님은 어머님 뜻으로, 어머님이 주말 쉼터로 이용하겠다고 갑자기 집을 사달라고 하셔서 내 학교 대출과 아주버님 회사 대출로 사드렸던 작은 아파트로 모셔왔다. 어머님이 자주 들러 챙기시지 않을 테고, 평생 그러하셨듯이 일주일에 한 번 잠깐씩 들르실 게 내 눈에는 확실히 보였지만 형님은 신이 났다. 두 분을 결혼시키는 것 같아 행복하다고 했다. 시골에서 아버님을 작은 아파트에 모셔놓고, 내 예상대로 어머님은 우리 집에 계시다가 주말마다 그곳에 들르시곤 하셨다. 내가 육아휴직 중이었는데도 가실 마음이 없으시니 평생 해오시던 대로 그렇게 사신 것이다. 그 와중에 글 서두에 썼던 '고모님 댁 방문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얼마가 흘렀을까? 아버님이 아니었으면 분양받지 못했을 그 넓고도 좋은 아파트 입주를 3개월 남겨두고, 우리 아버님은 작은 아파트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계셨고, 어머님은 시골에 다녀오신 후 아버님의 마지막 모습만 함께하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나는 슬픔에 빠져 한 달을 울고 다녔다. 셋째 아이 육아휴직 중이어서 아이를 업고 매일 미사 참석이 가능했다. 너무나 서러워서 울고 또 울었다. 너무나 죄송해서 울고 또 울었다. 보다 못한 신부님께서 내게 이야기 좀 하자고 하시고 설움에 복받쳐 울며 말하는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셨다. 그리고 따스한 눈빛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자매님, 그 마음 다 알아요. 막내며느리가 그렇게 울고 있으면 아버님이 하늘나라로 못 가십니다. 이젠 아버님을 놓아드리세요. 아버님이 며느님 마음 다 아시니까 많이 고마워하실 거예요. 아버님을 위해서 이제는 울지 마세요."
신부님 말씀을 듣고 나니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아버님은 50대의 건강한 모습으로, 넓은 기와집 옆에 있는, 폭이 아주 넓은 대로에서 환히 웃고 계셨다.
"에미야, 난 괜찮다. 그동안 고마웠다. 하늘나라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마."
청각장애가 있으셨던 아버님이 눈빛으로 내게 말씀하고 계셨다. 그 이후 나는 긴 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랬다, 그랬었다. 상처 많은 시댁을 만나 나는 특별한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 30여 년에 눈물과 고통과 억울함도 있었고, 결혼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 시집살이를 과감히 받아들인 나 자신을 바보 멍청이라고 비난한 적도 있었다. 깨어지고 부서졌던 기나긴 세월은 내 삶의 큰 공부였다. 세상 물정 모르고, 늘 하하 호호 아이처럼 까르르 웃던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장이 발효되듯 조금은 익어있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난 어느새 내 살아온 모든 인연과 일들을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의 하나뿐인 형님이 어머님 삼우제 이후 맏며느리의 역할을 포기하고 잠수를 타셨지만, 괜찮다. 다 괜찮다. 형제가 의절 상태가 되니 내 살아온 시간들이 너무도 허망하여 긴 슬럼프와 슬픔에 빠지기도 했지만, 5년을 지나면서 원망이나 미움이 많이 사라졌다. 감사로 하루를 채울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