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돌아오시는 거예요?”
“저... 안 돌아가요.”
2007년, 딱 이맘때였다. 1년 병 휴직에 이어 복직을 하기로 한 11월! 그 한 달을 앞에 두고 나는 학교에 사직서를 냈다. 느낌으로 알았을까? 내가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학급의 한 엄마가 내게 전화를 했다. 우리 둘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수화기 저 너머에서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난 기어코 울고 말았다. 그렇게 같이 울다가 전화를 끊었다.
천직이라 여기고 살았던 직업이었지만, 나는 거기에서 달리기를 멈추었다. 자주 아픈 몸이 싫었고, 잦은 병가 때마다 느끼는 죄의식이 싫었다. 아픈 내 몸과 마음을 좀 쉬어주고 싶었다. 어찌 보면 온전히 나만을 위한 최초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늘 내 결정에는 부모님이 계셨고, 어머님이 계셨고, 시댁 형제들이 있었고, 내 가족이 있었다.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다. 내 몸이 아픈 건, 내 마음이 아픈 건 내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또는 모두가 잘 되기 위해서, 나는 충직한 개처럼 그렇게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았다. 그리고 너무나 젊은 20대 후반부터 병원을 내 집 드나들 듯 살아왔던 것이다. 너무 힘들다고, 이제 더는 못 살겠다는 내면의 아우성을 무시한 채 살았던 참혹한 결과였다.
삶이 달라졌다. 못한다는 말도, 싫다는 말도 가끔 할 줄 알았고, 햇살 좋은 오전에 빨래를 널었으며, 정성껏 음식을 만들며 노래를 불렀다. 지쳐서 누워있던 아픈 엄마의 모습을 자주 보고 자란 우리 삼 남매의 얼굴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그거면 되었다. 그거면 되었다. 눈에 띄게 공부를 잘했던 우리 큰딸은 초등 교사였던 엄마가 있었지만, 무늬만 엄마였고 무늬만 교사였던 엄마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스스로 공부를 하면서 꽤 힘들었다는 걸 나중에 말해서 알았다.
삼 남매는 다 자랐다. 큰딸은 대학원 졸업식 두 달 전에 취업이 되어 서울에서 연구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고, 아들은 전역 병사들이 연락해서 만날 정도로 장교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 막내딸도 대학 졸업 후 직장에 다니고 있다. 차를 타고 가다가 하늘이 멋있다고 며칠 전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난 우리 삼 남매가 여행지에서나 일상에서 내게 사진을 보내주면 그렇게나 좋다. "엄마, 알지? 내가 엄마 사랑하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결혼 34년 차, 한 남자를 만나면서 어마어마한 시댁을 만나, 몸 고생 마음고생을 어마어마하게 했다. 철부지 아가씨가 익고 익어서 많은 걸 품을 수 있는 중년 여인이 되었다. 얼마 전에 들었던 명상 영상에서 들었던 말이다.
"내 살아온 삶을 축복합니다."
나는 그 말에 울컥하고 말았다. 울컥하면서 스스로에게 많이 애썼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내 살아온 모든 삶에 대해 감사했다고, 축복한다고 고백했다.
서로 응원한다고, 사랑한다는 카톡을 매일 주고받는 우리 부부, 서로 설거지를 하겠다고 싸우는(?) 우리 부부, 아직도 둘이 있으면 밤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우리 두 사람! 이 정도면 결혼 34년, 잘 살아온 거 아닌가.
사진 : 네이버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