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6편> 이기적 떳떳함
“아니, 오늘 무슨 일이 있었냐면. 최근에 새로 입사한 애들 몇 명이 있는 데 그중 하나는 나랑 동문이더라고-.”
네가 직장 사람들 이야기를 자주 한다. 최근에는 새로 들어온 신입들에 대해서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를 자주 했다. 근데, 그냥 막연하지만 느낌이 별로다.
“응. 근데?”
“동문이라서 그런지 내심 걔가 일을 잘했으면 좋겠는 거야. “
안 봐도 비디오다. 잘했으면 좋겠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가서 말 걸었을 너를 생각하니 괜스레 짜증이 나기도 한다.
이건 그냥. 여자의 촉-. 그런 거.
“너 근데 걔네 얘기 많이 하네.”
“.. 아니 신입들이라 귀엽다고 이야기하는 거잖아.”
“귀엽다고?”
순간적으로 정적이 흐른다.
“나 말 실수한 거야?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얼떨결에 풍겨오는 나의 검은 아우라에 네가 허덕이며 핑계를 댄다.
며칠 전에도 너는 회식 자리에 신입들과 앉았다. 여자들 사이에 껴서 신입들이 너에게 ‘잘 가르쳐줘서 저희 다 좋아해요.‘ , ’멋있다고 생각해요.‘라는 칭찬의 말에 기분이 좋다고 방방 거렸다.
그래. 생각해 보면 내가 사회생활은 너보다 좀 더 길어서 내가 칭찬을 해준다 해도, 그게 그 사람들 만큼 순수하게 들려오진 않았을 수도 있겠다.
.. 그런가? 솔직히 말해 긍정을 쥐어 짠 것일 뿐. 기분 나쁘다.
이번에 너희 부서로 발령 났다는 신입들 중 대다수가 여자였지만 모든 여직원들이 신경 쓰이는 건 아니다.
그냥, 느낌이 조금 미묘한 사람들 몇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람들 얘기 그만해라, 생각 그만해라, 술자리 자제해라. 이유는 내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으니까라는 이기적이고 맥락 없는, 하지만 연인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으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는 이유다.
며칠 후 네가 당직을 서고 또 술을 마셨다.
같이 마신 사람은 이번 들어온 신입 중에 남자직원 하나였는데, 난 솔직히 탐탁지 않았다.
“내가 일 똑바로 하라고 으름장 놨어.”
넌 으름장 놓은 걸 자랑하듯이 이야기했다.
난 네가 그들과 술자리를 통해 가까워지고, 그로서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직장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게 될 테고, 순진무구하고 착하게 생긴 너에게 선 넘을 것 같아서 싫은 것도 있었고-.
.. 그냥 뭔가 신입들과 술자리를 갖는 기회나 빌미가 생기는 게, 그게 싫다.
.
.
그 이후로 며칠 후, 역시나 너는 너네 부서에서 신입들에게 열려있는 사람이 되었다.
“오늘 여자신입애가 술 먹자 하는 거 철벽 쳤다.”
넌 자랑이 아닌 것을 자랑인 양 이야기한다.
“.. 철벽?”
“오늘 일 끝나갈 때 며칠 전에 내가 그 남자신입이랑 술 마신 얘기가 나왔는데, 여자신입 중 하나가 나한테 와서 저희도 같이 당직서는 날 있지 않냐고 하는 거야.”
“.. 그래서. 뭐라고 철벽을 쳤는데? “
“철벽 제대로 쳤지. 물어보니까 당직 시작하는 날이라는 거지? 그래서 ‘나는 당직 끝나는 날이지만 넌 시작하는 날 아니냐. 그럼 네가 다음 날 당직 설 때 일에 지장이 갈 테니 절대 안 된다.’라면서 철벽 쳤어. “
“.. 그게 어떻게 제대로 철벽 친 거지..? 결국 네가 걔 체력 배려한 거 아냐?”
넌 억울한 듯 쳐다본다. 왜? 내가 칭찬이라도 해주길 바랐어?
내가 요 며칠 신입들이랑 술 먹지 마라, 걔네 중 몇 명 얘기는 자주 하네?라는 말을 해서 그런지 넌 쓸데없이 주절댔다.
“어쨌든 술 먹자 하는 거 철벽 친 거잖아.”
“.. 근데 지금 철벽 쳐야 되는 관계가 된 게 웃기지 않아?”
“그야 네가 신경 쓰고 질투하니까..”
“그니까.. 그니까, 내가 왜 걔를 신경 써야 하는 건데?”
넌 뭐가 자랑이고 뭐가 잘한 거인지 모르는 것 같다.
너와 그 신입여자애가 같이 당직을 서는 그날이 왔다. 나는 다음날 오후 일정이 있어서 아침이 되어 네가 퇴근하기까지를 잠자코 기다렸다.
여덟 시, 여덟 시 반.
왜인지 네가 결국 그 여자애와 함께 술을 마시러 갈 것 같아서, 그 불길한 예감이 틀리길 바라다보니 잠이 오지를 않았다.
그렇게 뜬 눈으로 널 기다리다 보니 네게 연락이 온다.
‘오늘 끝나고 다 같이 국밥 먹으러 갈 것 같아.’
그럼 그렇지. 역시나 ‘다 같이’ 간다고 말한다.
너의 당직 후 국밥에는 10중 10 술이 함께했다. 오늘도 마찬가지겠지.
그럼 또, 술자리라 핑계 대고 연락이 두절될 거고, 필름이 끊길 거고, 늦게 들어오겠지.
“며칠 전에 철벽 쳤다고 말해놓고 결국 그 사람이랑 술 마시러 가네.”
메시지를 보낸다. 예상되었던 상황이지만, 예상되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 내가 받는 스트레스에 머리가 아프다.
너는 그렇게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내가 기분이 좋지 않다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오늘 늦을 것 같아.’였고, 나의 메시지를 전혀 읽지 않은 것 같다는 말에 ‘얘기 나누는 게 재밌어서 그래.‘ 였다.
그대로 내 메시지를 읽고 답장이 없는 채로 시간이 흘렀다.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연락도 안되고 오지도 않았다. 전화를 걸어봐도 무시하는 너의 태도들이 나에게 너무 처참하게 다가왔다.
한 시까지 꾸역꾸역 기다려보다 나도 일정이 있어서 더 이상 너를 기다려줄 수가 없었다.
왜, 하필, 내가 신경 쓰인다고 몇 번이고 말했던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또 연락이 안 되는 거지?
나에 대한 배려심에 무릎을 탁 치며 일어났다.
이를 아득바득 갈며 나갈 준비를 했다.
.
.
그렇게 한 시 반이 조금 지나, 집에서 나가기 전 휴대폰을 들여다봤지만 역시나 깜깜무소식이었다.
한숨을 푹 쉬며 집 밖으로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에는 통화를 하며 웃고 있는 네가 보였다.
여태껏 난 연락도 안되었는데, 통화하는 사람은 누굴까-.
너. 휴대폰을 잃어버렸거나 배터리가 없던 게 아니었구나. 내가 건 전화는 모르는 했던 게 사실이었다.
모든 건 의식하고자 하는 노력의 나름인데.
나는 혐오감이 가득 찬 눈빛으로 너를 째려봤고,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너는 내 기분을 그제야 실감했는지, “자, 잠깐만..!” 하며 나를 강하게 붙잡았다.
마음에 울화통이 터진다. 속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건물 밖으로 나서니 전화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내가 지금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까지 화난 건데?”
“잘못이 뭔지 모르겠다고? 내가 신경 쓰인다는 사람하고 술자리에서 또 연락두절됐잖아. 한두 번도 아니잖아, 너 이러는 거. 난 너 이러는 거 더 이상 못 받아주겠어. 너랑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 만나. “
“진짜 모르겠다고. 이러지 마, 진짜. 미안해.. 아니, 왜 미안해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너는 입을 열수록 나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너는 정말로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 했지만, 정말로 억울한 듯 큰 목소리로 도대체 뭘 미안해해야 되느냐고, 난 떳떳하다고 소리쳤다.
휴대폰 너머로 너는 엉엉 울고 있었지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주옥같다. 너의 술버릇은 내가 고쳐줄 수가 없다.
“내가 철벽 치느라 얼마나 고생하고 노력했는데.. 뭘 잘못했는데, 내가-. “
역시나, 술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구나-.
“.. 무슨 노력을 했는데.”
“그 애가 자꾸 들이대고 그래서 내가 피하고 불편하다고 표현하느라 얼마나 애썼는데.. “
“.. 그럼 나는?”
“...... “ 너는 답이 없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나.
진짜로 술자리에서 너, 내가 떠오르지 않는구나.
우리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지 않았다면, 넌 그냥 내게 연락 한 통 없이 뻗어버렸겠구나. 그럼 나는 너의 생사 확인을 다시 너네 집에 들어와 봐야 알 수 있었겠네.
네가 술자리를 마시던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난 그렇게 너를 확인했어야겠구나.
“난 억울해. 걔가 계속 옆에 와 앉고, ‘오빠’ 거리는 거 불편하다고 계속 표현하고..”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을지. 연락이 안 되는데. 그리고 너 나 마주쳤을 때 누구랑 통화하고 있던데? 그럼 휴대폰 배터리가 나간 것도 아니었고 그냥 내 메시지를 씹은 거잖아.”
“그, 그건 같이 있던 다른 동기가 나보고 철벽 잘 치더라 하면서 얘기한 거야. 내가 걔 잘 들여보내려고 다 같이 아이스크림도 사 먹이고, 나도 힘들었어. “
“네가 뭣하러 그래야 되는데? 그리고 웃으면서 통화하던데? 네가 그 상황이 진짜 불편했으면 그 얘기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거야? 그 자리에 꾸역꾸역 끝까지 남아서 뭣하러 이이스크림까지 네가 사 먹여? “
“... “
“결국 넌 내 생각 안 하고 그 자리에 끝까지 있었던 거잖아? 게다가 사지까지 들여 아이스크림 사주면서 더 같이 있고, 나한텐 연락 한 통 없었고. 내 딴엔 넌 그냥 그 상황을 즐긴 거야. “
“.. 그건 나도 직장에서 이런 걸 처음 당해보니까.. 당황해서 그런 거지. 결론적으로 아무 일도 안 일어났잖아. 집에 들어왔잖아.”
“나에 대한 배려가 단 하나도 없는데, 네가 당당하면 다 되는 거라면, 너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만나라고. 난 안 되겠으니까.”
휴대폰 반대편으로 발 동동 구르며 엉엉 우는 네가 들려왔다. 뭐라고 허공에 대고 짜증을 내고 있다.
넌 진짜 절대로 너 자신이 떳떳하구나. 난, 너를 담아줄 수 있는 그릇이 못된다.
화가 나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핸들을 꼭 쥐어 잡았고, 꾸역꾸역 어떻게든 주차했다.
“.. 나 가야 되니까 끊어.”
넌 그렇게 내게 연락 한 통이 없다.
내가 화난 게 짜증이 나서 너도 헤어져야겠다 결심했거나, 최악의 경우 이래 봤자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거나 잠이 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