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5편> 온전히 나를 사랑해 줄 수는 없을까
금일 에피소드는 직전 글 <우리 관계에 불안을 느끼는 과정 2> 남자 시점편 입니다
"오늘 당직근무 끝나고 국밥에 한 잔 할까요? “
나는 당직 끝나고 국밥이든 해장국이든, 돈가스든 먹는 걸 좋아했다. 당직근무 시에 생각보다 일이 바빠서 야식을 먹거나 중간에 잘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뭔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래. 좋지.” 오늘 근무 총괄을 보고 계시는 선배가 답했다.
나는 추가로 함께 일하고 있던 동기에게도 물었다. 그녀도 좋다고 이야기했다.
“오늘 셋이서 국밥 먹으려고. 기다리지 말고 자. “
새벽에 나는 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알겠어. 술도 마셔?’ 새벽 두 시인데 답장이 오는 것 보니 역시나 너는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간단하게만 한 잔 하거나 안 하고 금방 들어갈 거야.”
나는 답장을 급하게 하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
.
새벽 여섯 시 반이 넘어가고 각자의 위치에서 일을 하다 모두가 사무실 테이블에 앉았다.
“너도 갈래? 끝나고 국밥 먹을 건데.”
오늘 근무 총괄자 선배가 미처 묻지 않은 근무자들 둘에게 물었다.
약간은 당황스럽다. 한 명은 친구들이 많이 겹쳐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이긴 했어서 괜찮다 쳐도, 다른 한 명은 그녀의 부사수로 여자친구가 조금 신경 쓰고 있는 신입이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가서 행실만 똑바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네, 좋아요.”
신입 여자애가 웃으며 답한다. 왜인지 이 자리가 마냥 편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우리는 퇴근 후 아침 여덟 시에 문 여는 순대국밥 집에 갔다.
“오늘 끝나고 다 같이 국밥 먹으러 갈 것 같아. “
가는 길 급하게 여자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사무실 사람들은 내가 여자친구가 있는 걸 몰랐다. 그래서 이 여자애가 꼈다고 해서 자리를 갑자기 빼기도 그렇고, 중간에 나오기에는..
내가 놀고 싶다.
근데, 바지 속 울려대는 휴대폰 진동에 몰래 화면을 보니 네가 기분이 상한 것 같다.
“아 오늘 너 근무 때 왜 그랬어-!”
함께 마시고 있던 동기가 내게 장난친다. 메시지를 확인하려던 휴대폰을 급하게 다시 집어넣었다.
“아, 왜 그래 진짜. 장난인 거 알잖아. “
웃으며 대답하고, 이 자리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신입 여자애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눈은 반쯤 풀려있다. 쟤 취했나? 왜 저래. 생각하는 데, 나랑 눈이 마주칠 때마다 베실베실 웃는다.
“오빠-!”
.. 이 자리에 남자는 나 하나뿐인데. 오빠라고 불릴 사람은 나뿐인데.
당황스럽다. 직장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존칭을 부르는데, 나는 나랑 동갑이거나 동기이지 않은 사람들과 말을 놓거나 호칭을 달리 해 본 적이 없다.
신입 여자애의 ‘오빠’ 소리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마치 방금까지도 사석에선 이렇게 부르며 지낸 사이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묘한 정적이 흐르는 사이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나 얘한테 오빠라고 불러도 된다고 한 적 없음. 일방적인 호칭임. 나 억울함.’을 표정에 가득 안고 함께 있는 일행들의 반응을 살폈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생각한 것 같진 않았고, 다만 이 여자애 때문에 묘하게 어색해진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생각하는 동시에 또 한 번 “오빠아-”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애가 몸을 베베 꼬며 애교 떨 듯 이야기한다.
“제가 진짜 좋아하는 거 알죠?” 얼굴은 복숭아처럼 분홍 빛으로 바뀐 여자애가 헤헤, 거리며 이야기한다.
“.. 뭐, 뭐라고요..?”
그 현장을 반 당황, 반 흥미로 바라보던 다른 일행들은 점점 미간이 찌푸려졌다.
“일할 때 맨날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고.. 오빠 최고-!”
이성적으로 좋다기보다, 그냥 선배로서 좋게 생각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오빠’라는 두 글자에 저 말이 되게 이상해 보인다.
“그래도 ‘오빠’라고 부르지 말고요. 사원님. 서로 사원님이라고 부르는 사이잖아요. “
나는 내 나름의 벽을 치는 대답을 했다. 내 앞의 신입 여자애는 입술을 삐죽이다 고개를 푹 떨기며, 힝- 소리를 냈다.
“야, 안 되겠다. 다 같이 2차 가자.”
서로 눈치를 보다 선배가 한 마디 했다. 분위기를 뒤엎고자 하는 그녀 나름의 시도 같다.
“아, 좋죠. 얼른 당장 가요. “
나는 위기를 모면하면서도, 분위기를 어색하지 않게 하는 최선의 방법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게다가 놀고 싶은 마음이 이렇게도 강한 데 이 여자애 때문에 망쳐버리고 싶지 않아서.
2차에 가자고 벌떡 일어났다.
이동하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는 중에 급한 대로 휴대폰을 꺼냈다.
메시지가 잔뜩 와있지만, 텍스트 하나하나를 제대로 읽을 틈이 없어 “나 오늘 늦을 거 같아.”라고 급하게 답장했다. 이후에 곧바로 네게 연락이 오는지 휴대폰 진동이 연속해서 울렸다.
택시 앞자리에 타서 간신히 휴대폰을 꺼내 보니 화면에 네게서 온 답변이 여섯 통. 한숨만 나왔다.
암호를 풀고 들어갔는데, 너와 했던 메시지 창이 가장 마지막에 켜져 있어서 얼떨결에 너의 메시지들을 읽어버렸다. 잔뜩 화가 난 너의 메시지에는 텍스트가 너무 많아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다.
‘.. 내가 지금 화가 났다고 말하는 데 답이 그게 끝이야?’
그리고 그 긴 메시지들 마지막 너의 말,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이다.
나 죄짓고 사는 것도 아니고 떳떳한데 넌 왜 화가 난 걸까.
쿼티 자판기 위에 올려져 있는 내 손가락이 갈피를 잃었을 때쯤, 2차 장소에 도착했다.
그래, 조금 있다가. 조금 있다가 뭐라고 답할지 생각나면 그때 답하자.
.
.
2차에서도 신입 여자애는 자꾸만 들이댔다. 말 그대로 들이댄다는 표현이 딱 적절했다. 근데, 그냥 연애를 안 해본 것도 아니고 이 여자애가 이러는 건 그냥 어떤 남자가 이 자리에 있든 간에 이렇게 행동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정도로 가벼워 보였다.
‘어휴, 얜 평소에 이렇게 노나 보네.’
생각이 스쳐갈 때쯤 또 내게로 다가오는 그 아이의 손을 빠르게 블로킹하고, 슬쩍씩 옆으로 자리를 옮겨 멀리했다.
점점 취기가 올라 술을 마시지 않는 동기 한 명을 제외하고 네 명의 목소리 데시벨이 점점 커져만 갔다.
“손님들. 이제 낮 장사 해야 되니까 나가주세요. “
세상에나. 술집에서 쫓겨난 건 처음이었다. 시간을 보니 열두 시 반쯤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그제야 너의 메시지를 마주했다. 아까 얼떨결에 메시지를 보고 답장을 못해 네가 잔뜩 화가 난 것 같다.
‘얘기하는 게 재밌어서 그래..’ 뒤늦은 답장을 보냈다.
“아, 난 이제.. 더 취해서 못 먹겠어. 들어갈래. 간다.” 계산할 때 보니 어느새 다섯이서 소주 10병 이상 마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선배는 계산을 마치고 갑작스레 집으로 가버렸다. 선배 집 쪽에 와서 마시고 있었는데, 부리나케 가버렸다.
사실 나도 너무 들떠있긴 한 것 같다.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나머지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끝까지 남아있어야 해. 되새김질한다.
얼떨결에 다섯이 넷이 되었다. 선배가 가고 나니 길바닥에서 우린 잠시간의 어색함이 흘렀다.
”늦었네. 벌써 열두 시 반이야. “ 입사 동기가 말했다.
내 입사 동기는 술을 먹지 않는지라 온전한 제정신이었다.
“그러게.” 퉁퉁 부은 혀로 나는 답했다.
“사원님도 이제 가시죠. 제가 데려다 줄게요. “ 동기는 신입을 보며 이야기했다.
“아닙니다. 더 마실 수 있습니다! “
“아니, 사원님 취했어요. 저랑 같이 가요.” 동기도 여자였는데, 엄청난 사명감이 발동한 것 같았다.
”저 진짜 괜찮아요. “ 비틀거리며 나를 붙잡고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 앞뒤가 맞지 않았다.
“.. 그럼 나 먼저 간다. 저 갈게요. “ 동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동기는 자기 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남은 셋은 같은 쪽에 살았다. 자취방까지 가는 데에 20분 정도 걸어야 했다. 비틀비틀, 위태롭게 걸으며 자꾸 나를 붙잡으려고 해서 함께 먹던 신입의 사수인 동료가 아이를 붙잡으려고 하고 부축해주려 해도 자꾸만 내게로 왔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아이스크림 먹고 갈까요?” 내가 물었다.
둘은 나를 쳐다봤다. 눈앞의 아이스크림 가게를 가리키며 “제가 쏠게요. 먹고 술 좀 깨고 가요.”라고 했다.
둘은 그제야 좋다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싱글 컵 세 개를 시켰다.
.
.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15분 만에 해치웠다. 그리고 10-15분 정도 걸리는 숙소로 향했다.
신입은 아까보단 덜하지만, 계속 비틀거렸다. 자꾸 내 옆으로 와서 팔짱을 끼고 손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써단다. 나는 그 애를 계속 밀치고 서있는 자리를 떨어져 있는 쪽으로 바꿨다.
진짜 이건 창과 방패의 싸움이다.
“탈락-!” 계속 밀쳐대는 나에게 신입이 내 면전에 손가락질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 뭐?” 나는 황당하고 기분 나빴다.
신입은 취해서 비틀대는 건 여전했고, 그제야 혼자 걸으려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드디어 내 자취방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급하게 인사하고 자취방 입구가 보이는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헤어지자마자 휴대폰을 들었는데, 곧장 전화가 오고 있었다. 아까 함께 자리에 있던 동료였다.
“여보세요?”
‘어, 이제 헤어졌어?’
“응. 이제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중. “
‘아까 걔, 너한테 너무 달라붙더라.’
“그러니까. 나 너무 당황했잖아.”
‘그래도 잘 쳐내던데.’
“짜증 나 죽는 줄.”
‘근데, 네가 한 번 얘기 제대로 해. 네가 당한 건데 남들이 나서서 걔한테 뭐라고 하기도 좀 그래.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었잖아. 이건 네가 한 마디 해야 하는 거야.’
“그런가?” 난 불편한 소리 하는 거 딱 질색인데.
‘응. 메시지든, 면전에서든 꼭 해. 안 그럼 걔 사회생활하면서 그러는 거 못 고쳐.‘
“그래. 알겠어. 푹 쉬고 곧 봐.” 나는 웃으며 답하는 중 자취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내리려는데.
네가 보인다.
나를 진짜 혐오스럽단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