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7편> 불행한 나는 불안한 우리 관계에 집착하게 된다.
‘아무것도 못하겠어..‘
최근엔 그저 무기력했다.
직장에서 늘 신뢰받던 나였는데, 최근에 몹쓸 오해가 생겼다. 소문은 빠른 속도로 퍼져만 갔고, 졸지에 나와 엮여있는 많은 사람들이 골치를 먹어야 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안 좋은 일들이 자꾸만 겹쳐서, 내내 울기만 했다.
정신 차리고, 정신을 붙잡고, 해결해야 할 일들을 알아차리고 해결해야 하지만 내 마음은 자꾸만 무너져만 가서 왜 ‘내게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난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는데 신은 왜 나를 돕지 않는가’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들 뿐이었다.
이런 온전치 못한 내가 너무나도 떳떳하지 못해, 최근엔 본가에 갈 기력조차 남지 않았고 부모님은 물론이고 친구들까지도 볼 수 없을 정도의 나약한 정신상태였다.
너는 끊임없이 나를 환기시켜 주려고, 애써 노력했다.
그렇게 집에 누워있기를 좋아하고, 혼자 노는 걸 좋아하던 네가 나의 피폐해지는 모습에 상응해 주려고 애썼다.
‘네가 힘이 없어 보이니 나가서 산책하자-’ 라기보다는 내가 우울해하며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야 하나-’라는 질문에 ’그래. 지금 나갈까?’였다.
그러니까, 내가 집에 있자고 하면 ‘나야 좋지.’였다.
연애 초반, 그렇게 자신만만해하고 당당해하던 나를 바라보던 너는 나의 가장 최측근이 되어 내가 무너져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그런 너에게만 나는 온전히 솔직할 수 있었고, 온전히 기댈 수 있었으며, 완전히 내 편이길 바라왔다.
그리고 너의 마음도 나와 같길, 하는 이기적 마음까지 들게 되어, 그런 이기적인 나 자신은 떳떳하지 못한 나를 피폐해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자꾸만 너를 찾았고, 너도 내 곁에 있는 것이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자꾸, 네가 나를 벗어나는 것만 같다.
네가 나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만 같다.
“.. 나 오늘 나갔다 와도 돼?”
“어디?”
“헬스장. 한 시간만 하고 올게.”
어느 순간부터 네가 외부활동하는 것을 내게 허락받는다. 심지어 너는 헬스장 가는 것, 동사무소 가는 것까지도 내게 허락을 받았다. 물론, 나는 장난처럼 묻는 것이라 생각했다.
“응. 얼른 와.”
.
.
”어디 가는데? “
“친구가 술 먹자고 해서..”
네가 술을 마시러 간다고 하면, 그렇게 신경이 곤두섰다.
“친구 누구?”
그러다 같이 먹는 사람이, 그 사람과 너의 데이터에 네가 만취한 모습이 없었다면 괜찮았다.
하지만, 아이러닉 하게도 너는.
’나 오늘 일 끝나고 한 잔 하고 들어갈게.‘
내가 너의 술친구로는 정말 싫어하는 사람들, 너와 이벤트가 있던 사람들과 마시는 술자리에 나갈 때는 통보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늘, 걱정한 대로 연락은 두절되어 네가 살아있는 지를 확인하려면 내가 너를 찾으러 가야 했다.
너와의 신뢰가 완전히 무너진 사건은, 내가 야간 근무를 하는 동안에 이루어졌다.
일종의 나의 야간 근무란, 너에게 자유로운 밤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한다.
이태껏 내가 야간일 때 네가 연락이 안 될 정도로 필름이 끊길 만큼 술을 퍼마신 이력이 많아서, 나는 늘 아침에 퇴근하고 너의 생사여부를 확인하러 너의 집으로 향하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너는 그 어느 날, 밤늦게 피시방에 가겠다고 했다.
‘피시방? 로데오에 있는 피시방으로 가는 거야?‘
‘아니. 멀리까지 안 가고 여기 집 앞에 있는 거.‘
‘응. 들어갈 때 알려줘.’
나는 네게 메시지를 보내고 일을 시작했다.
.
.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되어 새벽 두 시경 쉬는 시간이 생겼다. 그렇게 잠시나마 앉아 휴대폰을 봤다.
‘나 고등학교 친구 만나서 술 마시려고.’ - 2:01
‘2차 왔어.’ - 02:32
너에게 두 통의 연락이 와 있었다.
이상하다.
‘갑자기 친구한테 새벽에 연락이 온 거야?‘
어떻게 새벽 두 시에 술 먹자는 연락이 오지? 평소에 둘은 그렇게까지 연락하고 지내던 사람들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응. 근처에서 술 마시고 있었나 봐.’
‘엥? 그럼 그 친구가 같이 마시고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갑자기 새벽에 자리를 파하고 너와 술을 마시겠다고 연락이 왔다고?
’ 모르겠어. 근처 돌아다니다 연락해봤나 봐.’
넌 내 속도 모르고 ‘나 모르쇠-.‘ 한다. 모르겠어? 지금 내가 널 의심하니까 의심하지 않게끔 알아서 친구한테 왜 이 시간에 연락한 거냐 물어보고 납득가게 설명하란 말이다.
납득 못할 건 뭐냐 싶은 걸까.
너는 SNS를 하지도 않아서, 네가 깨어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저 너에게 메신저를 보내서 답장이 오거나 전화를 해서 받게 되면 그제야 ‘깨어있나 보다-.’를 알 수 있는데, 갑자기 새벽 두 시에 혼자 돌아다니다 너한테 술 먹자고 연락을 했다는 게 너무 흔하지 않게 느껴졌다. 특히나 남들하고 연락도 잘 안 하고 지내던 너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근데, 30분 만에 2차를 간 거야?’
새벽 두 시에 연락이 와서, 새벽 두 시 반에 2차를 왔다는 것도 너무나도 이상하다.
‘응. 금방 나왔어. 늦게까지 안 마셔. 집 들어갈 때 연락할게.‘
역시나 너는 연락한다 해놓고 연락이 두절되었다.
아침 여덟 시, 퇴근을 하고 나는 너의 집으로 향했다.
너는 침대 위에서 대각선으로 뻗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바닥에는 너의 옷들로 널브러져 있었다.
합리적인 의심과, 몹쓸 촉이 온다.
‘......’
이걸 보는 순간 너와의 관계는 완전히 무너졌음을 인정하는 꼴이라는 거. 안다.
나는 연애 초반 네가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떳떳하게 밝힌 너의 휴대폰 비번을 치고 메신저 어플을 켜봤다.
최근 메시지 중에는 내가 의심할 만한, 그러니까 내가 싫어할만한 사람들과의 연락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연락이 없다.
‘....‘
심지어 네가 만난 고등학교 친구에게서도 온 연락이 없다.
네가 말한 고등학교 친구를 검색하여 채팅창을 보니, 마지막 대화는 5개월 전이었다. 혹여나 전화를 했나 싶어, 전화목록도 봤지만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그 친구와 연락한 흔적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최근 누군가랑 연락한 흔적 또한 전혀 없었다.
카드 내역도 확인해 봤는데, 피시방 외에 결제된 내역이라고는 전기자전거를 탄 흔적뿐이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만나러 로데오거리로 나간 것은 확실하다. 네가 말했던 새벽 두 시에, 누군가를 만나러 간 게 맞았다.
”...... 일어나 봐. “
나는 쿨쿨 자고 있는 네가 야속해서, 근데 도저히 내 감정이 추슬러지지가 않을 것 같아서-. 너를 깨운다.
“어? 어. 왔어? 고생했어....”
너는 흐린 눈으로 나를 보다 이내 잠이 들려했다.
“오늘 누구 만나서 뭐 했어?”
“.. 고등학교 친구..”
“빨리, 솔직하게 말해. “
“고등학교 친구 만나서 처음에 술집에 잠깐 있다가 2 차가서 막걸리 마셨어.”
너는 마치 짜인 대본을 읊듯이 빠른 속도로 문장을 내뱉었다.
“... 솔직하게 말해. 너 그 친구 만난 거 아니잖아.”
“.. 아냐.. 진짜야..” 너는 내 속도 모르고 반쯤 잠든 채로 말했다.
“근데 왜 네가 그 친구랑 최근에 연락한 게 5개월 전인거지-.”
너는 내 말을 듣더니 두 눈을 번쩍 떴다.
“.. 누구 만났어?” 나는 너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재차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나도 솔직하게 말할게. 너무 이상해서 너 핸드폰 봤어.”
“... 그, 그.. “ 너는 말을 더듬었다.
“너무 이상해서, 봤어. 미안. 네가 그 친구랑 연락한 지 5개월이나 되었고, 전화내역도 없고, 최근 연락한 사람도 없는데 자전거 탄 흔적은 있더라. 누구 만났어? 솔직하게 말해. “
“.. 역시 나는 거짓말을 못하는 것 같아. “ 괜히 이제 와서 무너진 신뢰를 애써 붙잡아보는 멘트.
“... 빨리 말해. 누구 만났어.”
“.. 화 안 낼 거야..?”
“들어보고.”
“... 화 안 낸다고 해주면 말할게.”
“들어보고.”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직장 동기한테 연락이 왔는데, 네가 그 친구랑 술 마시는 거 싫어하니까.. 그래서 고등학교 친구라고 속이고 갔는데..”
“응. 근데?”
“거기에 그 신입 여자애가 있었어. “
“.... 그, 걔?” 그, 걔라 함은. 얼마 전에 너랑 엮였던 그 여자애?
“응. 그래서 나도 당황했어.. 진짜야.”
“진짜로 모르고 갔어? 솔직하게 말해. 걔랑 마시고 싶었던 거 아냐? “
물론 이 질문에 너는 무조건 몰랐다고 하겠지. 그렇지만, 너의 입으로 ‘그 애랑 마시고 싶을 리가 없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나 보다.
“.. 진짜야. 몰랐어.”
“근데, 거짓말을 쳤네.”
“... 미안해. 진짜 안 그럴게.”
“네가 이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려면 정말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거야.”
“응. 당연하지. 내가 잘못한 건데. 봤잖아. 거짓말도 더럽게 못 쳐서 바로 걸리는 거. 나도 체질에 안 맞아.”
결국 지금 순간을 무마하려는 핑계.
나는 주절대는 네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 나 안아주면 안 돼?”
너는 또, 모자라지만 애틋한 강아지인척.
무마하려 한다.
네가 늦을 때마다, 연락이 안 될 때마다 나는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벌써 불안해지는 이 관계가 맞을까.
왜 넌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보다 그런 것들이 우선이 되는 걸까.
아직 난 널 많이 사랑하고, 의지하고 있단 말이야.
나는 오늘도 조용히 너를 안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