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경과 흑경이 만든 차분함이 머무는 집

고요가 번져가는 집

by 오륜록

현관문을 열면
하루의 소음이 한 발 뒤로 물러난다.


아내는 간살 원목 중문 너머로
흐릿하고 따뜻하게 번지는 실내 조명을 바라보며
“집에 왔다”는 감각을 가장 먼저 느낀다.


남편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오늘 마실 와인을 어디에 둘까 잠깐 고민하고,

아이는 신발을 벗어놓은 채 거실 쪽으로 달려가며
고양이의 이름을 부른다.


이 집의 하루는
항상 현관의 조용한 공기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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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 _ 좁았던 입구가 ‘여유’가 되는 순간


이전 집은 현관이 너무 좁아서
가족이 동시에 움직이기 불편했다.

그래서 이번 집에서는

현관 자체를 ‘넓어 보이도록’ 만드는 데 가장 많은 고민을 담았다.


자동으로 닫히는 중문은
집 안과 현관 사이를 가르기보다
간살중문을 사이에 두고 온기를 서서히 번져나가게 한다.


문 너머로 보이는 공용부는
이 집이 가진 고요한 분위기를
첫 발자국부터 보여준다.


남편은 현관에 들어서면
벽에 걸린 작은 조명을 가장 먼저 켠다.
그 빛 아래, 아내는 장바구니를 가볍게 내려놓으며 말한다.
“오늘은 집이 더 따뜻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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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_ 수납이 아니라 ‘리듬’을 만드는 공간


이 집의 긴 복도에는 숨겨진 기능들이 가득하다.

양 옆으로 마련된 수납공간은
와인렉, 와인냉장고, 생활용품, 계절 소품이
질서 있게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특별한 건
복도 천장과 벽면에 반복되는 리듬감 있는 라인이다.

빛과 그림자가 그 라인을 따라 움직이며
저녁이면 작은 갤러리처럼 느껴진다.


아이는 복도를 지날 때마다
그 라인 위로 손을 올려
길게 이어진 그림자를 흔들어본다.

‘우리 집 복도는 좀 멋있다’는 말을
종종 하곤 한다.


아내는 그런 모습을 보며
“집이 사람을 바꾼다”는 말을 떠올린다.


정돈된 복도는 가족의 시간을 단정하게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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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_ 깊이감 하나로 완성된 시선의 중심


거실에 들어서면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6인용 식탁 옆에 자리한 세로형 흑경이다.


그 흑경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공간을 하나 더 열어주는 창문 같은 역할을 했다.

낮에는 자연광이 반사되어 집을 밝게 만들고,
밤에는 식탁 위 조명을 담아
거실을 더 깊고 부드럽게 보이게 한다.


소파는 단 하나,
중앙에 놓인 1인용 소파가 전부다.

TV도 없다.
이 집은 대화와 음악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끼는 스피커를 켜 놓고
소파에 기대 앉아 와인을 한 잔 마신다.

아내는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어
오늘의 일정을 체크한다.

고양이는 소파와 와인장 사이를
부드럽게 오가며
자기만의 동선을 만든다.


모든 소리가 고요하게 이어지고,
모든 움직임이 현란하지 않아
이 공간은 늘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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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 _ 아일랜드보다 ‘감각’이 더 큰 아일랜드


원래 가족은
가능하면 대형 아일랜드를 원했다.
하지만 구조상 넣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대형처럼 느껴지는 아일랜드’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빛을 반사하는 소재의 은경 포인트였다.
아일랜드 하부와 주방 벽면 일부에 적용된 은은한 반사는
단순히 밝아 보이는 효과가 아니라
“공간이 하나 더 생겨난 듯한” 깊이감을 만들었다.


주방의 동선은
조리 → 세척 → 준비 → 식탁
이 리듬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설계되었다.


이 집의 주방에서 가장 많이 나는 소리는
재료 써는 소리도, 프라이팬 소리도 아니다.
커피 내리는 소리,
와인 병 마개를 여는 소리,
잔을 부딪히는 작은 소리들이다.


그 소리들이 이 집의 주방 리듬을 만들고
집 전체의 공기가 천천히 단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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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속 다양한 표정


우리집의 표정은 ‘깊은 고요’다.


현관의 따뜻함에서
복도의 리듬,
거실의 깊이감,
주방의 여유,
욕실의 밝은 마무리까지


모든 장면이 서로의 속도를 방해하지 않고

하루의 감정을 조용히 떠받쳐준다.


가족의 생활 흐름과
집의 구조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공간은 ‘집의 표정’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집은
늘 같은 리듬으로
그들의 하루를 고요하게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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