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녀, 나의 엄마들

연대의 정신

by 천둥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맨 뒷자리에 앉아있었는데, 손등으로 뭔가가 뚝 떨어져 만져보니 눈물이었다. 다행히 버스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앞에 앉은 사람들은 다들 창문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데도 뭔가 못할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딸꾹질을 시작했다. 라디오에서는 부모님 어쩌고 하는 노래를 청승맞게도 부르고 있었다. 노래가 흐르기 바로 전 누군가의 사연에서 엄마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 갑자기 기억이 났다. 나와 비슷한 사연이었던가. 모르겠다. 아, 그런데 내가 라디오 사연에 나올법한 사람이 되었나. 가족을 등지고 집을 나오고 엄마를 만나지 못하는 사연 많은 여자, 그게 나라니. 비로소 내 처지가 자각되었다. 꽤 잘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아침이면 베개가 젖어있고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버스를 타고 있는 꼴이라니.


젊은 날 집을 나왔다. 살려고 나왔는데 또 다른 이유로 살기가 힘들었다. 그때 나를 먹여주고 재워준 두 엄마가 있었다. 친구 s 엄마와 후배 k 엄마였다.

s의 엄마는 s가 모진 시집살이에 둘째를 임신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시댁을 뛰쳐나왔을 때 시어른의 전화에 이렇게 말하는 분이었다.

"s가 집에 오지 않아 아직 만나지는 못했지만 오죽하면 아이 가진 어미가 제 발로 둥지를 나왔을까요? 다신 그런 곳에 발들이지 않게 할 겁니다. "

그리고 둘째를 지우겠다는 s에게 이렇게 말했다.

"혼자 자식 키우고 살려면 서로 의지 되게 둘이 낫다."

그런 강단이 있던 s의 엄마였는데 내게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다. 어른이랍시고 야단을 치거나 설득하지도 않았고 섣부른 위로도 하지 않으셨다. 마치 하룻밤 자고 가는 것처럼 대해주셨다. 나도 하루 놀다 갈 것처럼 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낯 뜨겁고 민망하면서도 감사한 일이다.

s엄마는 우리와 같이 밥도 해 먹고 같이 티브이도 보며 생활했지만 k엄마는 식당일을 하느라 새벽에 나가서 밤에 들어오셨다. 새벽마다 밥하는 소리가 들리고 잠이 깨어 나가 보면 상이 차려져 있었다. 얼굴 마주칠 일이 없어 군식구로서는 편했다. 결국 k집에서 결혼식 날 아침을 맞이했고 k방에서 신부화장을 했으니 k엄마가 나를 시집보낸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날 아침에도 k엄마는 잘 살아라, 한마디만 하셨다.


s엄마는 그 뒤 미국 아들네 집에 가셨다. 그동안 한국에 몇 번 다니러 오셨지만 한 번도 제대로 뵙지 못했다. k엄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k에게 엄마가 많이 아프시다는 얘기를 듣고서도 가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죄송하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사람 노릇을 못하고 사는지 한심할 뿐이다.

두 엄마에게 진 빚을 갚을 길이 없지만 뻔뻔하게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들이 내게 내어준 따뜻한 마음을 내게 오는 또 다른 힘든 이들에게 갚자고. 막연하게 품었던 생각을 구체화한 계기가 있다.

둘째를 가졌을 때 <황금똥을 누는 아기>의 저자 최민희 씨 강의를 들었다.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임신부 점심 값은 자신이 내겠다고 했다. 강사에게 밥을 사드리지는 못할망정 얻어먹을 수는 없다고 했더니, 뒤늦게 임신했을 때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밥을 얻어먹어서 이후로 임신한 사람들을 만나면 무조건 밥을 사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누구나 결심은 할 수 있지만 모두가 실천을 하며 살지는 않는다. 나도 그래야지, 내가 받은 다정한 친절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지, 엄마들에게 받은 것만큼은 못되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기회 닿는 대로 엄마들처럼 살아야지, 다짐한다.


최근에 또 한 명의 엄마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0여 년 만에 친구 j를 만났는데 그 친구 말이 내가 그 집에서도 일주일 이상 머물렀다는 것이다. 세상에,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j엄마가 가끔 내 안부를 묻기도 한다는데, 그런 신세를 져놓고 정작 나는 j엄마를 뵌 적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정말 배은망덕이다. 이래 놓고 무슨 신세를 갚고 엄마들처럼 살겠다고 하는 건지.

순전히 내 입장에서 변호를 해보자면, 그 당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가 집을 나온 기간이 몇 년간이었는지 몇 달 간이었는지조차 모르겠고, s나 k나 j네 집에서 뭘 하면서 지냈는지도 모르겠다. k의 집에서 회사에 다녔다는 건 기억한다. 자매처럼 옷을 돌려 입기도 했었다. 그런데 s집에서는 놀았던 기억만 있다. 이어지는 기간이었으니까 회사를 계속 다녔을 텐데 말이다. j네 집은 학생 때 놀러 간 기억만 있다. 너무 오래전 일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지우고 싶은 시절이어서 더 그런 것 같다. 기억이라는 건 이토록 믿을 게 못 된다. 중요한 건 내가 그녀들을 제2의 엄마, 나를 키워준 엄마로 기록한다는 거다. 미래가 과거를 만들어가는 거니까.


누구나 흔들리는 한때가 있다. 정처 없는 방황기를 보내기도 한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해주고 지켜봐 주고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것은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과 동료애, 인류애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모성이니 희생정신이니 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깊은 애정으로부터 나오는 관심과 지지의 힘이었다. 그녀들은 내가 잘 곳, 먹을 것만 내어준 것이 아니라 깊은 공감력으로 나를 이해하고 품어주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으로 정서적으로 연대해주었고, 갈 곳이 없는 이가 겪을 수 있는 불행으로부터 막아주었고 곁에 두고 같이 먹고 자고 생활하게 함으로써 물질적 연대까지 해주었다. 살면서 만난 수많은 이들이 손을 내밀어주었지만, 나의 엄마들은 그 누구보다 품 넓게, 말없이, 무조건적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것은 순전히 나의 엄마들 덕분이다.


페미니스트인 친구 ㅎ에 의하면 많은 여자들이 돌봄 중독이라고 한다. 지나치게 남들을 돌본다는 말이다. 하지만 중독은 자신에게 과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는 자신을 돌보지는 못하고 남을 과하게 돌본다. 그래서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서로를 지극히 살피고 배려하고 나누어준다. 각자가 자신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면서도 서로를 돌보는 그녀들, 엄마들이다.

그녀들 외에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엄마들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내 아이들의 엄마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아이들의 엄마 노릇도 하자며 학부모 활동을 했던 것도 어쩌면 그녀들이 덕분이었을지 모르겠다. 때로 내 아이가 아닐 때 더 해줄 수 있는 것이 있고 내 엄마가 아니어야 기댈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다른 아이들에게 조금만, 아주 조금만 엄마 노릇을 해주면 좋겠다.


더 이상 엄마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나이가 되어서도 우리는 엄마의 그늘 안에 있다. 과연 인간에게 엄마가 필요 없는 나이라는 게 있을까. 어쩌면 죽을 때도 엄마를 부르며 죽지 않을까. 어쩌면 엄마란 어떤 대상이 아니라 생존, 그러니까 존재론적 불안이 부르는 종교의 이름이 아닐까.

가끔 그때의 엄마들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c의 어머니가 있다. c가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다가 낙선을 했다. 죄송해요,라고 말하는 c에게 어머니는 뭐가 죄송하냐, 죄송할 거 하나도 없다. 나는 걱정도 되지 않는다. 너희가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 뭐가 걱정이냐. 우리 신경 쓰지 말아라, 하더란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누군가의 어머니가 한 말인데, 나는 안도하며, 엄마라고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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