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만족을 주는 그녀들

by 천둥

한때 매주 옥택연을 보는 맛에 살았다. 가마솥을 번쩍번쩍 드는 걸 보기 위해서였다. 저질체력인 나는 뭐든 가뿐하게 해치우는 옥택연을 보며 가슴이 뻥 뚫리는 쾌감을 느꼈다. 힘센 남자들이야 많지만 유난히 <삼시세끼>의 옥택연이 좋았던 건 밥을 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힘들이지 않아서 좋았다. 사실 남자들이 <삼시세끼>를 해 먹는다는 기획부터 마음에 든다. 남자가 음식을 하면 훨씬 잘하는 이유가 재료를 아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자들은 살림을 하는 입장에서 재료를 아끼지만 남자들은 살림이라는 개념 없이 눈앞에 놓인 한 끼만 잘해먹겠다고 있는 재료를 양껏 때려 넣는다. 요령 없이 하루하루를, 아니 한 끼 한 끼를 해치우는 모습에서 오히려 활력을 느낀다. 역시 요리는 남자가 해야 돼, 편안하잖아. 보는 내내 호탕하게 웃어댄다.


무엇보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서사를 좋아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가끔 옥수수 지옥에 갔다 오기도 하지만) 오로지 삼시세끼 해 먹는 일에만 과도한 정성과 열의를 다하는 모습이라니.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지 않는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건 예능이 가진 최고의 미덕이다.

그러다 염정아 윤세아 박소담이 나오는 걸 보면서 짜증이 났다. 배우로서는 너무 좋아하지만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에서 보고 싶지는 않았다. 왜 여자들한테 밥을 시켜! 이 삼시세끼같은 놈들아! 아무리 게스트로 남자들이 와도 주 출연진이 여자들이라니, 여자들이 밥해먹는 게 무슨 예능이냐, 다큐지. 구시렁거렸다. 육수를 끓여 쟁여놓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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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운동뚱>에서 김민경이 다시 쾌감을 느꼈다. 김민경은 옥택연만큼이나 힘들이지 않고 몸을 썼다. 어떤 종목을 시켜도 쉽게 익히고 쉽게 써먹었다. 스스로 잘한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그래서 더 집중해서 배우고, 배운 대로 바로 적용하면서 이게 뭐, 어려워? 하는 무심함이 킬포인트다.

<맛있는 녀석들>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한 김민경만의 안정감이 있다. 어떤 동작도 어설프지 않다. 몸에 착 달라붙은 균형감이다. 그녀의 몸으로 대리만족을 느낀다. 나는 다음 생에는 김민경 같은 몸으로 태어날 거다. 정말 그러고 싶다. 그렇게나 몸을 잘 쓰면서 어떻게 그동안 전혀 몰랐을까? 의아하다가 자기 몸을 마음껏 써볼 기회 따위는 우리에게 없었음을 떠올린다. 김민경 스스로도 그런 말을 한다. 하도 힘이 좋아 자기가 움직이다 누가 맞으면 크게 다칠까 봐 조심했다고. 여자에게 몸은 조심해야 하는 영역이었다. 내 다음 생은 여자들이 몸을 마구 휘두를 수 있는 세상이길 간절히, 정말 간절히 바란다(그러려면 이번 생에 뭐라도 조금 바뀌어야 할 텐데).

그녀 덕분에 많은 이들이 헬스장에 가서 더 이상 살 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운동이 하고 싶다고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냥 김민경처럼 운동하고 싶다고 하면 끝. 이것만으로 김민경은 한국 여성운동사(?)에 자기 할 일(??)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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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김민경에게 환호하고 있을 때, <노는 언니>가 시작되었다. <노는 언니>는 언니(달력상으로는 언니가 아니지만 멋있으니 언니다)들의 등장만으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박세리가 굳이 플렉스 하지 않아도, 정유인이 굳이 팔뚝을 걷어붙이지 않아도 그녀들에게서는 카리스마가 뚝뚝 흘러내린다. 그녀들은 대화를 나눌 때조차 경지에 이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와 공감력이 묻어 나온다. 대단한 조언을 해주지 않아도 깊은 유대감이 흘러넘친다. 마치 오랜 세월을 산 할머니들이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주기만 해도 다 안다는 느낌이 전해지는 것처럼. 다정하지만 다감하지는 않은데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다정한 그녀들이지만 무언가 시합이 시작되면, 그 순간 거기가 어디든 그게 무엇이든 치열한 정글이 되어버린다. 조금 전의 유대고 다정이고 없다. 오직 승리만을 위해 집중한다. 희번덕한 눈빛이 그토록 섹시할 수가.

<노는 언니>의 소개 글은 다음과 같다. ‘참고 견디고 싸우는 건 잘하는 언니들. 노는 건 해본 적이 없는 언니들. 여성 스포츠 스타들이 놀기 위해 뭉쳤다. 여행도 가고, 마음껏 쉬고 먹고 웃어보자. 남들처럼!’ 완전 동의다. 노는 걸 해본 적 없는 언니들이 마음껏 노는 걸 보고 싶다. 처음에 언니들은 어떻게 놀지 몰라 방황한다. 은퇴선수들만이 아니라 현역들도 출연한다. 훈련이 있으면 빠졌다가 없으면 다시 출연하고 시합을 끝내고 오면 와르르 격려해준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서 더 생생하다. 다양한 종목의 선수들이 서로의 종목을 체험해보기도 하는데, 그럴 때조차 언니들은 절대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

뭐니 뭐니 해도 <노는 언니>의 매력은 소소한 일상 이야기에 있다. 은퇴나 연애, 결혼, 육아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것도 좋았지만 생리용품에 대한 사용법을 알려줄 때, 정말 귀한 프로그램이구나 싶었다. 어디에서도 나온 적 없는, 그러나 여성이라면 누구나, 특히 운동선수라면 더욱 고민이 될 부분을 굳이 감추지 않고 다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하다. 더 많이, 더 자주, 더 솔직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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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잘 쓰는 언니들이 놀 때, 몸을 써본 적 없는 그녀들이 골 때리러 왔다. 처음에는 여자들이 얼마나 몸을 못 쓰는가를 보여주는 예능인가 했다. 그런 오해를 할 만큼 아무런 훈련도 없이(했다면 미안합니다) 우르르 왔다 우르르 갔다 초등학생 경기를 보는 듯했다(초등학생들에게 미안합니다).

하지만 내가 외면한 기간 동안 그녀들은 축구가 얼마나 재밌는지, 몸 쓰는 게 얼마나 신나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운동뚱이나 노는 언니보다 골 때리는 그녀들이 더 본격적으로 여자들이 몸을 쓰는 것에 대해 어필했고, 사회적 인식마저 바꿔놓았다. 패셔니스타들이 멍든 얼굴을 마다하지 않고 다리를 절뚝이며 연습에 매진하고 배우들이 얼굴 신경 안 쓰고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진정성, 몸 쓰는 행복감이 인정되었다. 나 또한 신나서 그녀들의 몸의 해방을 축하해주었다. 와, 몸 쓰는 여자들 정말 멋있다!라고.


그런데, 두둥! 송소희가 나타났다. 잘한다, 멋있다를 넘어선 그녀, 아름다운 그녀! 지금껏 올림픽이나 기타 스포츠에서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장면을 많이 봐왔겠는가. 그런데 송소희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잘하는 것과는 다르다. 최고인 것과도 다르다. 그녀는 소속사에서 가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니요, 방송사에서 섭외가 간 것도 아니요, 그녀 스스로 골 때리는 그녀들을 간절히 원했다. 혼자 유튜브를 보면서 축구 연습을 해왔고 8개월 정도 매주 축구클럽에서 경기를 뛰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멍든 다리나 절뚝이는 모습 하나 없이 진짜 골을 차는 맛, 주력으로 달리는 맛, 패스와 작전, 팀워크의 맛을 직접 보여주었다. 물론 처음에는 체력적으로 힘들어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새 그것까지 갖춰서 나타났다.

연예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프로그램이니 당연히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한때 최고였지만, 송소희를 보고 있으면 최고를 이뤄본 자가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 최선을 다하는지를 실시간으로 보는 기분이었다. 그녀에게 축구란 그녀 이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일이다. 예능으로 얼굴을 알려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저토록 진심일 수가. 그녀는 처음 골 때리는 그녀들을 시작할 때 지금은 모든 것이 축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좋아한다는 건,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다하는 건 이토록 아름답구나, 인간은 그런 동물이구나, 감동하게 한다.


오나미나 정혜인, 주명도 잘한다. 그런데 송소희는 잘할 뿐 아니라 아름답다. 얼룩말이 달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더 아름답다. 잘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을 그녀의 행복한 표정에서 발견한다. 누군가가 행복해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행복을 느끼다니, 나 꽤 순수하구나 스스로에게 놀란다. 대리만족이 아니라 그냥 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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