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다 사주는 여자
그녀가 없으면 어쩔뻔했냐
"와우, 오늘 스타일이 좀 괜찮네."
그녀가 준 옷을 입은 날이면 어김없이 듣는 소리다. 평소의 나와는 다른, 제대로 갖춰 입은 티가 난다고 한다.
그녀는 내가 가진 거의 대부분의 옷을 주었다. 그녀에게 작아져서 주고, 그녀가 입었을 때 예뻐서 주고, 그녀가 입어보니 편해서 주고, 그녀가 입고 따뜻해서 주었다. 쇼핑하다가 딱 내 것이다 싶은 옷이라서 사서 보내고, 엄마 꺼 살 때 아버지 꺼 살 때 동생 꺼 살 때 괜히 신경 쓰여서 내 것도 샀다고 한다. 겨울 옷, 여름옷, 가죽 잠바, 트렌치코트, 재킷, 바지, 점퍼 등 내 장롱 안에는 그녀가 준 옷들로 가득 차 있다.
옷뿐만이 아니다.
"이거 만드는 거 힘든 거 알지? 누구 주지 말고 혼자 먹어."
여름이면 씨 부분을 도려내고 딱 4등분 해서 잘라낸 청매실을 소금과 설탕에 절인 매실장아찌와 딱 맞춤하게 익은 매실진액을 보내준다. 겨울이면 빛 고운 고춧가루로 담근 파김치와 채 썰어 담근 모과차를 챙겨준다. 그녀의 집에 갈 때 아무리 내가 신경 써서 뭔가 들고 가 봤자 나올 때 내 손에 들린 보따리는 두 번 세 번 차에 다녀와야 할 만큼 많다.
내 손으로 화장품을 산 것이 열 손가락 안쪽이다. 그녀가 다 주니까. 뿌리는 거, 바르는 거, 칠하는 거, 몸에 바르는 거, 얼굴에 바르는 거, 손에 바르는 거, 입술에 바르는 거 등등. 또 계절 아이템으로 겨울이면 바디로션과 오일, 립밤을, 여름이면 선크림과 미스트를 때맞춰 챙겨준다. 그러면서도 부담되지 않게 꼭 한 마디씩 덧붙인다.
"마침 1+1을 하잖아."
주방용품도 빠질 수 없다. 그릇이나 컵, 냄비 등 품목도 다양하다. 내가 애지중지하며 쓰는 부엉이 컵도 그녀가 준 거다. 대부분의 물컵이 200ml 남짓 들어가는 데 반해 부엉이 컵은 450ml가 너끈히 들어간다. 고기 구워 먹는 그릴과 전골을 해 먹는 전기냄비, 커피 드립퍼와 그라인더, 그 외 소소하게 위생비닐, 기름종이까지, 그뿐 아니라 나라면 절대 사지 않았을 후추병, 기름병까지 골고루 구비해서 바리바리 싸준다.
얼마 전에는 영양제가 잔뜩 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먹을 거, 밥 먹기 전에 먹을 거, 밥 먹으면서 먹을 거, 밥 먹고 나서 먹을 거를 구분해서 효과와 효능, 보관방법까지 깨알같이 써서 보냈다.
“영양제는 절대적으로 믿고 먹어야 해, 알았지? 우리 나이에는 먹을 때는 모르지만 안 먹으면 팍팍 티가 나는 거야. 그리고 약이 아니라 다 식품이니까 안심하고 먹어. ”
먹는 데 까다로운 내가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믿숩니꽈?를 몇 번이나 외치며 신신당부한다.
"떨어지기 전에 미리 연락해. 연락 안 오면 안 먹었다고 보고 다 돈 받을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영양제는 돈을 안내면 귀한 걸 모른다니까." 협박 아닌 협박이다.
내게만 이런 게 아니다. 남편에게도 옷이며 시계가 수시로 택배로 날아오고, 아이들에게는 가장 좋아하는 현금을 꼬박꼬박 챙겨준다. 얼마 전 대학 입학한 둘째에게는 장~~ 기 할부라고 두 번 세 번 강조하면서 노트북을 사주었다.
이렇게 받으면서 나는 가끔 투덜거렸다. 나도 내 스타일이 있는데,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없어. 그렇잖아도 쇼핑을 못하는데 이제는 어디 가서 사야 할지 모르게 됐잖아. 사주는 것만 쓰다 보니 물가를 아예 모르겠어. 그나저나 이렇게 받으면 나중에 내가 얼마나 갚아야 하는 거야?
받기만 한지 거의 30년째다.
아낌없이 내게 퍼부어주는 그녀의 이름은 시누이다. 시월드에 대한 수많은 안타깝고 분노스러운 이야기들이 난무하는 와중에 가장 얄미운 감초 역할을 하는 사람이 시누이일진대, 설마 그게 다 일리가? 아낌없이 주는 대신 알 수 없는 이유들로 괴롭히겠지, 예상할 것이다. 나도 두려웠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들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앞서도 얘기했듯이 30년째 무사하다(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 99%다. 1%의 가능성은 분명 있다!)
남편보다 두 살 많은 시누이는 비혼으로 시부모님과 같이 산다. 생활비와 그 외 모든 것을 책임지며, 부모님의 병원 수발까지 들고 있다. 젊어서부터 싹싹하기 그지없는 성격이어서 나를 긴장하게 했다(싹싹함과 거리가 먼 사람은 그런 사람만 봐도 숨을 곳을 찾는다). 다행히 그녀는 자신의 몸을 굴리는데 최선을 다할 뿐, 다른 이에게 자신과 같은 성격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녀도 노안과 관절염 등으로 예전처럼 빠릿빠릿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다른 형제들에게 퍼주느라 바쁘다. 얼마 전 아버님은 입원을 하고 어머님은 허리를 다치고 본인은 관절염으로 병원 세 군데를 동시에 다닌 적이 있다. 안절부절못하는 내게, 너는 아프지만 말면 된다고, 네 남편만 엄마한테 안부전화 자주 하게 하라고 말하다가 그마저도 본인이 직접 말하겠다고 했다.
그녀가 내게 온갖 것을 주는 것은 넉넉해서가 아니다. 그녀도 봉급 생활하는 직장인이고, 부모님을 모시는 가장인지라 언제나 빠듯하고 미래가 불안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주변 사람을 챙기는 것이 몸에 배어있다. 뭐든지 풍성하게 해서 나누는 것을 즐긴다.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퍼주는 것 같다. 내게 뭔가를 줄 때마다 또 퍼준다고 할까 봐 어머님 눈치를 볼 정도다. 본인 몸보다 남의 몸을 더 아낀다. 본인의 도리를 하지 남의 도리를 탓하지 않는다.
물론 엄청 생색을 낸다. 생색을 내도 할 말이 없게 잘하지만, 엄청 고맙다고 오버하지 않으면 엄청 서운해한다. 엄청 당연한 일이다. 천성이 오버를 잘 못하는 나지만 오버할 필요가 없다. 정말 너무 고마우니까. 게다가 우리 집에서는 내가 가장 살갑게 표현하는 편이다.
"엄마, 고모가 없었으면 우리 어쩔 뻔했어?"
명절을 보내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아이가 봐도 고모의 역할은 큰가 보다. 명절을 명절답게 웃고 떠들고 즐길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시누이가 만들어낸다. 가족들이 먹을 맛있는 음식들을 미리 고민하고 재료를 준비하고 우리 모두가 가만히 앉아서 먹기만 하도록 대접하는 것을 즐긴다. 설거지라도 할라치면 먼길 가는데 어서 가라고 등을 떠민다.
아이고, 그러게 말이다. 고모 없으면 어쩔 뻔했냐, 중얼거리다 막막해졌다. 딸 없는 나는, 그리고 너희는 나중에 어쩌나...
덧. 시월드에 시달리는 많은 여자들이 이 글을 보고 재수 없어할 것이다. 나도 시누이가 뭐든지 좋은 것은 아니다. 투덜거릴 만한 일들도 충분히 있지만, 그런 글을 쓰기에는 받은 것이 너무 많다. 그녀가 지금의 나를 이어가도록 환경을 조성해준 소중한 여자임에 틀림없다. 이만하면 나의 그녀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어쩌랴. 재수 없어도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