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그녀

by 천둥

여자라는 말보다 그녀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그녀라는 말은 분명한 3인칭을 뜻하기 때문이다. 남편의 여자라고 하면 남편의 소유를 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여자에게도 남편은 특별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남편의 그녀라고 하면 남편에게도 3인칭이 되는 여자를 부르는 말이 된 것 같고, 또 그녀에게도 내 남편이라는 남자가 3인칭이 될 거 같다. 가장 좋은 것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 3인칭이 그 여자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는 나의 의지를 담은 듯해서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우기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한다.


갑자기 나타났다, 그녀는.

농장을 하고 있을 때인데, 가족들과 우리 농장에 놀러 와서 하루를 실컷 놀고 갔다.

남편은 그들이 놀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했고 그녀의 딸이 해맑게 수영을 하는 것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딸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내게 동의를 구하는 말을 반복해서 해서 짜증나게 만들기도 했다. 어쨌든 누군가가 내 공간에 와서 놀다가 가는 것은 고마운 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신경이 쓰이기도 하니까 나는 좀 지쳐있었다. 게다가 나는 그녀를 전혀 모른다. 어떤 연유로 남편에게 그렇게 특별히 잘하는지.

분식집을 하는 그녀는 남편이 갈 때마다 주먹밥과 김밥에 단무지까지(특별히 맛있는 거라고) 잔뜩 싸주어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꺼내먹도록 했다. 김밥을 좋아하는 남편은 신나서 받아왔는데, 진짜 크고 맛있어서 나도 은근히 기다려졌다.

이번에는 열무김치를 한통 보내왔다. 내 시어머니에게도 그동안 고구마며 옥수수 등을 보낸다고 들었는데, 김치라니...

도대체 어떤 사이냐고 캐물었다.

"어릴 때 친구라니까."

남편은 다 알지 않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들은 것은 같은 동네 살았던 초등학교 친구이고, 부모가 일찍 돌아가셔서 나이 차이가 좀 있는 오빠랑 살았다는 것. 일찍 결혼했는데 아이를 못 낳는다고 구박받고 이혼당했다가 지금 사는 남편과 딸 낳고 잘 사는 중이라는 것. 곡절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남편과 더 특별해질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왜 그렇게 잘한대? 당신이나 당신 엄마한테까지?”

“걔가 부모가 없잖아. 시댁도 없대. 그래서 그런 거지.”

“아니, 그렇다고 옛날 동네 친구 엄마한테까지 잘한다고?”

목소리가 좀 커졌다. 이해가 안 되었다. 아무리 마음 줄 어른이 없다고 해도 지금도 만날 수 있는 어른도 아닌 옛정 하나로 그렇게까지 잘한단 말인가.

“어떤 사이였는지 좀 더 자세히 말해줘 봐. 울 어머니한테까지 왜 그렇게 잘해?”
남편은 이해 못하는 내가 이상하다는 듯이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라도 그렇게 하겠다.”

“그러니까 나라도 그렇게 하겠다 싶은 무언가가 있었다는 거잖아. 당신들이 그 친구한테 뭘 어떻게 해줬는데?”

“뭘 해준건 없어. 걔가 부모가 없이 사니까 동네에서 다 챙겨줬지. 우리 집에서 국수라도 끓이면 걔 불러라, 해서 같이 먹이고, 겨울 되면 가끔 들여다보고. 걔 엄마랑 우리 엄마랑 몇 아줌마들이 계하던 사이였어.”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랬구나. 같이 계를 붓던 친한 이웃이 갑자기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이 혼자 남아 있는 걸 이웃들이 너도나도 불러다 먹이고 챙기고 했던 거였다. 그 애, 아니 그녀 입장에서는 엄마 대신이었겠다.


남편에게는 그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녀 말고도 그 동네에는 수시로 가족처럼 와서 밥 먹고 가는 이들이 많았던 듯하고, 다만 그녀는 친구였다는 것일 뿐 특별히 자신들이 해준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림책 <나의 독산동>에서처럼, 드라마 <응답하라 1998>처럼.

같은 서울에서 살았지만, 우리 집은 조금 서울깍쟁이 같은 동네였다. 낮에 골목에서 한두 시간 정도 자전거 타고 노는 아이들 소리가 들리는 게 전부였다. 서로 어울리는 이웃도 거의 없었고 나도 학교 친구들과 놀았지 동네 친구는 없었다. 골목 정서 같은 게 없는 동네에서 자란 내가 그런 남편의 정서를 대번에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남편은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게 맞나 싶을 만큼 완전 골목 정서 그대로 살아온 듯하다. 이웃집 숟가락 몇 개까지 다 아는 사이고, 집안과 밖이 구분이 없도록 열려있는 동네였다.

남편 입장에서는 딱히 설명한 게 없었을지 몰라도 내 입장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이야기라서 조금 감탄스러웠다. 시어머니는 딸 같은 그녀가 나타나서 얼마나 좋을까, 엄마를 잃은 그 꼬마가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감사인사를 드리니 얼마나 기특할까.

“내가 걔를 엄청 찾았어. 어찌 사는지 정말 궁금했거든. 근데 소식을 모른다던 친구가 동창회에 데리고 온 거야. 걔가 내 앞에 딱 서서는, 니가 나 찾는다고 해서 왔다, 그러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그녀는 자신을 찾아준, 궁금해해 준 남편이 너무 고마웠던 모양이다. 그동안 굳이 자신의 소식을 알리지 않고 있었는데, 남편이 거듭 찾자 그제야 동창들에게도 마음을 열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열무김치가 유난히 맛있다. 오늘은 강된장 자글자글 끓여서 열무김치 넣고 비벼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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