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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Nov 23. 2022

정상인가요?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났다. 여전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말이다. 이전에 비해 분명 얼굴에는 주름이 늘고 배에는 기름이 끼었는데 말하는 본새나 행동은 이전과 똑같다. 분명 회사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인데 왜 우리는 만나는 순간부터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가 버리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1년 365일 중에 360일을 술을 마시고 밤 12시에 귀가하는 삶을 살아왔다. 노느라 그런 게 아니라 열심히 사느라 그러했다. 건강하냐는 질문에 한 녀석은 올 초에 건강검진받았는데 아무 이상 없다고, 그런데 얼마 전 코로나에 걸려서 7킬로그램이 빠져서 좀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 말에 또 한 녀석은 쓸데없이 코로나 같은 걸 걸리느냐고 타박을 있는 대로 했다. 20년 전에 몸살을 앓았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으며 자신은 그 뒤로 지금까지 감기 한번 걸린 적 없다고 했다. 툭탁거리는 모습도 여전하다. 나이가 있으니 이제는 운동도 하고 건강관리도 하자는 내 말에 두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네가 할 말은 아닌데, 한다.      


집에 오는 길에, 그들은 정말 나와 같은 인간인가, 진지하게 생각했다. 술 한 모금 먹지 못하고, 먹었다 하면 온 근육이 다 아파오고, 어쩌다 친구들을 만나고 놀면 이틀을 쉬어야 하는 내가 그들과 같은 정상인에 속하는가 말이다. 사람이 가진 체력이라는 게 이토록 크게 차이 나는데, 정상과 비정상 딱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 걸까. 그 기준은 무엇이며 정상 부류의 끄트머리에 있는 자와 비정상의 끄트머리에 있는 자의 부당한 갭은 어찌할 것인가.

나는 서른 넘어 루프스라는 자가면역질환을 판정받았다. 받기 전이나 받은 후나 증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많이 달라졌다. 비정상인이므로 열외가 된 것이다. 그것은 때로 보호가 되기도 했지만, 낙인이 되는 때가 더 많았다.        

최근에 장애학에 대한 영상을 보았다(장애학의 도전, 김도현). 생각해볼 지점이 아주 많았다. 우선 장애에 대한 개념부터 살펴보자. 장애는 영어로 disability라고 하는데, 능력을 뜻하는 ability 앞에 부정 접두사 dis를 써서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장애인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어딘가가 손상되어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여기서 무언가는 노동인데(노동 사회이므로), 나는 문제제기할 수밖에 없다.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과연 장애인 뿐인가. 또는 노동을 할 수 없다면 모두 장애인인가. 노동하기 어려운 신체를 가진, 손상되어 회복되지 않거나 회복 중인 질병을 가진 이들은 왜 장애인이 아닌가. 전반적으로 허약한 게 더 큰 장애가 되는 나는 장애인인가 아닌가.


또한, 장애라는 개념은 1980년 세계 보건기구(WHO)에서 처음 정의하면서 자리잡기 시작했다. 기껏 40년밖에 안 된 개념이므로 끊임없이 그 분류와 패러다임이 바뀌었고 그에 따라 치료방법과 대응방법이 달라졌다. 노동하기 어려운 장애인을 어떻게든 헐값에라도 노동을 할 수 있도록 재활을 하자는 재활의학을 시작했고, 지금은 자립과 공생을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변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장애인이 탈 수 있는 버스가 생겼다. 손상은 그대로여서 장애는 여전한데 이전에는 탈 수 없었던 버스를 탈 수 있다면, 그것은 장애인가 누군가에 의해(즉, 사회) 장애가 생긴 것인가. 장애인은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규정하는데, 장애인이 의존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장애라고 하는 것은 장애인의 문제인가, 장애를 만든 사회의 문제인가. 무엇보다 인간은 누구나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데 장애인에게만 의존한다는 낙인을 찍는 것이 옳은가. 그러니 의존과 자립을 대립적인 개념으로 볼 게 아니라 상호 의존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의존할 수 있는 여지를 사회가 더 많이 만들어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또 나는 묻는다. 자립(여기서 자립은 시민으로서의 자기 결정권이 있는 것을 말한다)하고 있는 정상인이지만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는 장애인인가, 아닌가.      


어느 선진국(장애인 복지에 있어서 선진국인데, 어느 나라인지는 잊어버렸다)에서는 이민자들이 아직 언어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장애인 수당을 준다고 한다. 말 그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 암 환자의 경우도 장애인 수당을 주는 곳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만일 언어의 어려움을 겪어서 장애인 수당을 받는 누군가가 자신의 모국어로 쓴 글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아마 복지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들고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정은 장애인 노동권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다. 특정한 노동을 장애인은 할 수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할 수 있는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 여성, 청소년 등 약자는 물론이고 정상인(또는 일반인이라고 하는데, 이 표현 또한 괴이하다)들까지 확장해나갈 가치가 있지 않은가.       


내 친구 두 녀석은 노동을 할 수 있는 몸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는 정상이지만(그 범주 안에서도 너무 극단에 치우쳐있지만) 다른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정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가족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본다면 말이다. 그들은 매일 술을 먹고 늦은 시간 가정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분명 가족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그들을 비정상으로 낙인찍는다면 그들은 항의할 것이다. 절대적 시간은 부족했지만 관계가 나쁘지 않다면서. 이런 상상만으로도 화가 날 것이다.      

 

인간은 다양하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다르다. 너무나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인간이며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정상과 비정상은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각자의 몸이 다르고 각자의 몸에 맞는 음식의 양과 음식의 종류와 소화력과 활동할 수 있는 범위와 하고 싶은 범주와 정신적 지향도 다 다른 만큼 그것은 그 누구도(정부도) 정해줄 수 없고, 각자가 각자에게 맞게 조절할 수 있도록 존중하고 지원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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