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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Mar 05. 2023

봄마중

아파트에서 즐기는 봄

산에 갔다.

아파트 단지 안을 종으로 횡으로 때로는 둘레를 돌다가 그래도 뭔가 부족해서 근처 산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봄을 느끼고 싶었다.  

봄은 사람들의 겉옷에서부터 오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봄을 느낄 수 없었다. 바람이 차가워서 패딩을 입은 사람들도 꽤 되었다. 나를 포함하여.


버스를 타고 두어 정거장만 가면 산이다. 그걸 못 가서 아파트만 걷다니. 새삼 나의 게으름이 어이가 없다.

산까지 왔는데도 땅이 녹아 질퍽해진 것을 제외하면 딱히 봄을 만날 수 없었다. 그래도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 위에 서서 졸졸졸 흐르는 계곡물소리가 청명했다.

물아래 굵은 모래가 쌓인 곳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생각보다 지저분한 부유물이 눈에 이 띄었다. 그러다 사진을 찍었는데, 깜짝 놀랐다. 내가 보던 풍경이 아니다.  

물 위로 드리운 나무 그림자. 사진은 나무 그림자로 가득했다. 다시 눈으로 보니 과연 물그림자가 아름답다조금 전 내가 보던 것은 물속이었고 사진으로 보이는 것은 물 위에 비친, 겉면이었다.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보일 수가. 순식간에 마음의 풍경까지 달라진다. 


다시 산을 올랐다. 하얀 꽃 같은 것이 보다. 벌써 꽃이 피었을 리는 없고, 뭘까? 가까이 가보니 꽃받침인지 이파리인지 또는 진짜 꽃인지 겨우내 하얗게 마른 것이었다. 대칭으로 잎이 네 장 맞붙어있는데 꽃처럼 생기긴 했으나 꽃의 미덕은 없다. 자연이 만든 드라이플라워. 이번에도 사진을 찍어보았더니 분명 하얗게 반짝이던 것이 그저 다른 배경과 다름없는 마른 나뭇가지로 보였다. 



연이은 발견에 생각이 멀리 뛰었다. 본다는 건 뭘까? 내가 보고 느낀 것을 믿을 수 있을까? 믿어도 될까? 과연 우리가 본 것은 같은 것일까? 

다시 자세히 살핀다. 물아래 것과 물 위 그림자를 동시에 보려고 애써본다. 쉽지 않았다. 당연하다. 초점이라는 게 있으니. 우리는 나무 그림자와 물밑의 모래알 한 번에 보지 못하는 존재로구나. 빛의 산란이 주는 이미지만 보고서 마치 다 안다는 식으로 말하고 생각하며 사는구나.  


한동안 마스크를 쓰다가 마스크해제가 되 사람들의 민낯을 보고 깜짝 놀라는 일이 있다. 가까운 사람들이야 반갑기 짝이 없지만, 조금 멀리 있던 사람들, 예를 들면 자주 가는 식당이나 도서관의 대출담당자 등 내가 아는 그 얼굴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한 번도 그들의 민낯을 본 적이 없고 마스크를 쓴 얼굴, 눈만 보면서 나머지 모습을 나 혼자 상상했던 것 같다. 저 마스크 뒤에 이런 얼굴이 있겠지, 하고. 그런데 예상과 다른 얼굴을 보는 순간 헉, 소리가 나도록 놀라버린다. 어느 서점에서는 살이 빠지셨나 봐요, 하고 아는 척을 했다가 민망한 적도 있다. 사실은 처음 본 거라서. 마스크 뒤의 모습을 혼자 상상해 놓고 그게 사실인 걸로 착각한다. 나만 그런가. 

마스크가 아니더라도 겉모습만 보고 저 사람은 이러저러할 거야, 하고 혼자 상상하기도 한다. 또 보이는 대로 다 보지 않고 어느 한 부분만 도드라지게 보면서 그게 그 사람일 거라고 혼자 판단하고 멀리하거나 가까이하거나 했겠지.


문득 상담을 하는 친구의 카톡 프사에 "내가 보는 쪽이 정면이다"라고 쓰여있던 것이 생각난다. 멋진 표현이어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진짜 내가 보는 쪽이 정면이라고 믿으면 안 될 것 같다. 물론 그 친구가 하고 싶은 말은 각자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소신 있게 살자는 뜻임을 모르지 않는다. 또한 다른 이의 정면을 인정하자는 뜻까지 포함되어 있을 거다. 우리는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정면을 향하다가도 잠시 나 자신을 의심해 볼 필요도 있다. 각자의 소신만큼 무서운 게 없기도 하니까. 특히 요즘 사회는 더.

얼마 전, 언니와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누구보다 나랑 쿵짝이 맞았던 언니가 어떤 사회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글쎄,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하고 판단을 보류했다(구체적으로 쓰려다 말았다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그 순간 언니가 흔들리는구나, 올바르게 판단하려고 애쓰는 듯하지만 사실 이미 기울었구나 느낌이 왔다. 그런 느낌은 이상하게 정확하다. 그런데 그것은 나와 같지 않다고 상대가 기울었다고 의심하는 것일 수 있다. 게다가 내게는 우상 같았던 언니가 기울 수 있다고 의심하자 나도 기울었을 수 있다고, 우리는 각자 기울었을 거라는, 좀 더 객관적인 판단이 되었다. 각자의 기울기가 각자의 잣대가 되어 서로 틀렸다고 나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물속을 보느냐 물 위를 보느냐의 문제도 비슷하지 않을까. 과연 우리는 기우뚱기우뚱거리며 원판 돌리기처럼 돌아가며 나아가는 건가. 



그 와중에 발견한 우수관로.

자주 보던 건데 갑자기 궁금했다. 왜 하필 여기, 이 위치일까. 이것을 심은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빗물이 모일만한 길이 보였다. 산길이야 어디나 울퉁불퉁하고 기슭이야 어디나 기울어있지만 그럼에도 가장 적절한 지점에 관을 심는 사람들. 잠시 그들의 수고를 떠올려본다. 그들의 일이었을 것이고 이왕이면 잘 해내고 싶었을 거다. 빗물이 잘 빠져서 우리 같은 등산객은 덜 젖고 덜 질척이며 큰 사고 없이 산을 즐길 수 있다. 제대로 하지 않아 문제가 있는 뉴스도 많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성실히, 대부분의 세상일은 이렇게 별문제 없이 제자리를 잡고 있다.

고개를 끄덕여본다. 가끔은 의심하지만 주로 끄덕이며 살아간다. 보지 못했던 나무그림자를 이제는 잘 보려고 애쓰면서, 눈에 띄는 드라이플라워를 보면 반갑게 웃으면서. 봄을 발견하려던 오늘의 나들이가 적절한 의심과 적절한 감사로 이어진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봄을 발견다. 누군가 심어놓은 수선화가 고개를 내밀었다. 곧 노랗게 봄이 터지겠지. 봄마중 러 산에 가길 잘했다. 나갔다 들어와야 보이는 것이 있. 봄은 가까이에 와 있다.





게으른 창작모임 쫌에도 올립니다. https://brunch.co.kr/@53219277c0604d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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