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둥 Feb 24. 2023

눈 오는 날

아파트에서 즐기는 겨울

제주에 눈이 온단다.

사실 이 글은 지난 1월 눈 오던 날 썼다. 그런데 여기저기 수정하느라 이리저리 굴리다 때를 놓쳤다. 3월에 분명 꽃샘추위로 눈이 한바탕 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볼까 하다가 제주에 눈이 온다는 소식에 그냥 발행하기로 했다.  



눈이 온다.

의자 두 개를 가져다가 거실 창가에 놓는다. 한쪽에는 내가 앉고 한쪽에는 찻주전자를 올려놓는다. 창밖에 조용히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고요하고 적막하다. 가끔 차가 지나가기도 하지만 오로지 내리는 눈만이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어쩌다 아이들이 나와서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풀쩍 뛰어오른다. 할머니들이 조심조심 걸어 나오다가 미끌, 하면 식은땀이 나기도 한다. 택배 트럭이 와서 짐을 부리다 투덜거리는 소리가 온몸으로 전해져 올 땐 그렇게도 아름답던 눈이 조금 미워지기도 한다. 배달 라이더가 오면 그 마음이 더하다. 그러곤 다시 고요해진다.


거실 창으로 보는 아파트 앞마당은 한산하고 조용한 풍경을 선사한다. 사부작사부작 내리는 눈만 혼자 바쁘다가, 마침내 소식이 끊긴다. 하늘은 밝아지고 쌓인 눈은 빛난다. 이제 블루투스를 연결해서 음악을 듣는다. 눈이 내릴 때는 눈 오는 소리에만 집중한다. 비록 창문을 닫아서 들리지는 않지만 내 기억 속에서 재생되니까. ‘나를 위한 최애 믹스’를 선택하면 음악에 따라 눈앞에 놓인 눈 풍경이 달라진다.     

   

눈이 그치고 해가 비추면 산책 준비를 한다. 눈이 온 다음에는 기온이 조금 올라가니까 두껍게 입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장갑은 꼭 챙겨서 낀다. 분명 눈을 만지고 싶어질 거니까. 혹은 넘어질 수도 있고.

현관에서부터 나는 레드카펫 위를 걷는 행운을 누린다. 젖은 신발을 닦고 들어올 수 있도록 깔아놓은 낡은 카펫이지만, 내 눈에는 레드카펫이다. 진짜 레드카펫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걷는다. 계단을 내려가면 사람 한 명이 걸어갈 수 있는 폭으로 비질을 해놓은 풍경을 볼 수 있다. 산중 절터에서나 봄직한 싸리비질의 단정함이 묻어난다. 사락사락 소리 위로 작은 눈발이 날렸을 것이다. 비질을 해놓은 길을 조금 걷다가 놀이터 안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공간에 들어서본다. 내 마음은 눈 위를 뒹굴고 콩콩 뛴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저 뒤뚱거리는 펭귄 한 마리일 테지만. 아까 하늘로 뛰어오르던 아이가 친구들과 만들어놓은 오리 가족을 만날 수도 있으니 주의 깊게 주위를 살핀다.      


내 목적지는 가시나무까지다. 우리 아파트에는 한 그루의 가시나무가 있다. 가시나무의 이름이 무언지는 모른다. 검색을 해보면 탱자나무라고 하는데 한 번도 탱자가 열린 것을 본 적이 없다. 흰 꽃이 핀 것도 본 적이 없다. 그저 푸른 잎이 나다가 겨울이면 잎을 떨구고 가시만 남은 걸 발견한다. 그러니까 여름에 열매가 열리거나 꽃이 필 때는 눈에 띄지 못하다가 겨울에 가시만 눈에 띄는 나무인 거다. 적어도 내게는.


<가시나무>라는 제목의 노래를 알 것이다. 조성모가 불러 사랑을 받았지만 원래는 시인과 촌장의 노래다. 제목만 들어도 의미심장한데 가사는 더욱 절절하다. 가시나무를 처음 발견했을 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절로 음악이 흘러나왔다. 잊지 않고 한 번씩 에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가시 이야기가 먼저 떠오른다.  


가시나무가 몸통이 굵은 걸 본 적이 있는가?

가시가 있는 나무는 몸통이 굵은 나무로 크지 않는다.  

가시가 없는 나무라야 대들보도 되고 집도 지을 수 있는 나무로 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가시가 없는 사람이라야 몸통을 불리고 큰일에 쓰인다.


젊어서는 가시가 있는 게 좋았다. 그래야 더 나다운 거라고 생각했다. 어른들이 아무리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해도, 정 맞을지언정 모나게 나를 나답게 갈고닦고 싶었다. 글을 써도 내 글을 쓰고 싶지, 대중이 원하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건 굽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특성과 모난 걸 구분하지 못했다. 이제야 갈고닦아 가시를 만들 필요는 없다는 걸 안다.


패티김의 <가시나무새>라는 노래도 있다. 가시에 갇혀 날지 못하는 새, 고독에 떨지만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신세다. 새도 가시도 원치 않지만 서로를 놓지 못한다. 삶은 어쩔 수 없는 것들로 얼기설기 서있는 가시나무와 그 안에서 떨고 있는 한 마리 같은 게 아닐까.

겨울이면 가시가 더 뾰족해지고 단단해지는데, 흰 눈이 덮인 가시나무는 아주 조금 편안해 보인다. 가시는 여전히 가시지만, 눈은 어쩌면 찬 공기일 뿐이지만 그래도 촉촉한 물이니까, 가시에 맺힌 물방울은 가시를 보듬어주겠지. 가시는 그렇게 제 몸을 감싸는 손길을 통해 조금씩 연해지고 푸르러진다.

매일 가시나무를 보러 온다. 왜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는데 뾰족한 가시를 보고 있으면 왠지 안쓰럽다가 왠지 위안이 되기도 한다.   


다시 비질 한 길을 따라 돌아온다. 눈길을 더 오래 걷고 싶지만 눈길은 무릎을 긴장하게 해서 오래 걷기 힘들다. 이제 계단을 오르기로 한다. 오르는 동안은 조금 답답하지만 꼭대기 층에 오르면 마치 산 위에서 보는 듯한 풍경을 볼 수 있다. 멀리 눈을 덮은 흰 산과 짙푸른 하늘이 대비를 이룬다. 천천히 시야를 아래로 향한다. 조금 겁은 나지만 눈 온 날은 한 번쯤 아래를 내려다봐야 한다. 나무 위에 덮인 눈이 푸근하다. 그 사이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 눈을 덮고 주차된 차, 하얀 지붕. 하얀 세상. 하얀 마음. 하얀 웃음... 검은 세상에 어쩌다 내리는 하얀 웃음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아파트가 아니어도 즐길 수 있다. 그런데 아파트에서는 이 모든 게 예상가능해서 좋다.


 이 글은 게으른 창작모임 쫌의 브런치( https://brunch.co.kr/@53219277c0604d4/53)에도 올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물이 흐르듯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