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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Feb 14. 2023

물이 흐르듯

아파트에서 즐기는 겨울

어? 이게 뭐지? 방금 볼을 스친 그거 말이야.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다시 그것이 코로 들어왔고, 아 봄이 오는구나 깨달았다.


계절은 거짓말같이 겨울을 밀어내고 봄을 불러오고 있다.

봄을 언급하기에는 너무 이른 2월이지만, 절기는 분명 입춘이 지나고 봄바람이 코에 와닿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겨우내 환기 한 번 제대로 시키지 않고 꽁꽁 닫고 있던 창문을 요즘 자주 열어젖혔고, 기꺼이 신문을 찾아 현관문을 벌컥 열기도 했다. 식탁 위에 신문을 펼쳐 읽다 보면 수족냉증으로 챙겨 신었던 수면양말을 발가락으로 잡아당겨 벗어던지고 있다. 맨발로도 부족해 발가락 사이를 벌려 바람을 집어넣고 찬 바닥을 찾아 더듬거리다가 아직도 난방을 넣고 있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무신경한 관행에 대해 구시렁거리게 된다. 하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앙난방이어서 다행 운운했었다. 요즘처럼 난방비가 치솟으면 쫄보인 나는 아마 겨우내 냉방에서 오들오들 떨었을 거라며. 지금 우리는 누군가는 불을 때고 누군가는 문을 열어젖히는 부조리한 계절을 지나고 있다.  


요새 누가 종이신문을 보냐고 하겠지만 아침마다 종이를 펼쳐 신문을 보는 것은 꽤 괜찮은 루틴이다.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신문지를 넘기다가 우연히 발견한 하나의 사진. 바로 아래 사진이다.  


<한겨레신문> 빛으로 그린 이야기


흑백이어서 조금 아쉽고 흑백이어서 또 나름의 멋이 있는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고드름이 녹아 물방울이 떨어지는 장면일 듯하다. 사진이 담긴 기사는 '가슴을 녹여줄 정치가 필요하다'는 제목이었는데, 나는 정치같은 세상사와 상관없이 그저 봄, 겨울을 녹이는 봄이 떠올랐다. 

고드름에서 시작된 물방울이어서 봄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아니 처음에는 고드름인 줄 알아보지 못했으니 물방울만으로도 충분히 봄을 알린 셈이다. 한 번도 연결해보지 못했던 조합이지만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로 물방울은 봄으로 우리 몸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보통 물방울을 그릴 때 위에서 아래로 길게 좁다랗게 시작해서 둥글게 그리지만, 실제 물방울은 이렇게나 동그란 모양을 가지는 걸까. 또 물방울은 투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어딘가는 더 두껍고 어딘가는 더 가늘고 안으로는 약간의 균열을 지니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빛의 장난일지도 모른다. '빛으로 그린 이야기'라니 빛이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물방울과 빛은 조화롭게 봄을 표현하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발이 시원해진 만큼 가벼운 옷차림에 손이 간다. 겨우내 입었던 무겁고 칙칙한 패딩을 외면하고 조금 밝고 가벼운 외투를 꺼내 입는다. 모자를 못본체하고 목도리도 에라 모르겠다 던져두고 밖으로 나갔다가는, 휑 하니 부는 삭풍에 놀라 다시 총총 돌아온다. 음, 그렇지. 겨울이 순순히 자리를 내어줄 리가 없지. 세상에 그 어떤 존재도 손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설사 우주의 시간이 밀어낼지라도 마지막까지 버티고 투쟁하는 게 만물의 이치다. 그건 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탐하는 자로서 최선을 다해 쟁취해야 할 것이다. 

한낫 미물인 우리 인간은 이때를 조심해야 한다. 자연의 이치가 서로 다툼할 때 함부로 어느 편에 서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한바탕 기싸움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물러서 기다리는 거다. 말인즉슨, 마음 따라 옷을 홀랑 벗어던지면 큰코다친다는 뜻이다. 아직은 패딩, 아직은 모자와 목도리로 감싸야 한다. 그래야 뼛속까지 파고드는 살바람을 그나마 이겨낼 수 있다. 꽃샘추위는 이름이라도 있지 겨울 끝자락의 추위는 이름도 없이 말 그대로 그저 겨울이다. 

그래도 봄이 온다. 우주의 기운이 봄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지금은 물방울처럼 똑똑 떨어지는 겨울 끝과 똑똑 두드리며 다가오는 봄의 초입이다. 겨울이 또각또각 큰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다. 물이 흐르듯 봄은 오고 있다.




이 글은 게으른 창작모임 쫌의 브런치 (brunch.co.kr)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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