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산행을 마음먹었지만 토요일에는 덕질하느라 못 가서 현충일에 산에 올랐다. 산은 푸름 그 자체였다. 어느 산악회에서 단체로 왔는지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찢어진 청바지나 숏팬츠, 알록달록 셔츠 등 평소와 다른 복장도 눈에 많이 띄었다.
삼삼오오 서로 안부를 묻는 대화들이 귀에 들려왔다. 좁은 산길이라 피할 데도 없어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듣게 되었다. 70대쯤 되어 보이는 이들은 주로 건강이야기를 했다. 이번에 한 건강검진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고혈압 약을 먹는지, 대상포진 예방주사는 맞았는지 서로 묻고 답했다. 조금 발을 재게 굴려 앞으로 갔더니 이번에는 60대쯤 되어 보이는 이들이다.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계를 붓는 이야기, 너무 저렴한 단체관광은 나이 든 사람들이 따라가면 싫어한다는 이야기, 주로 야박한 세상에 대해 말했다. 다시 조금 더 앞서나가 보았다. 이번엔 30대인 듯한 젊은 여자들. 일본여행 가서 맛있었던 음식 이야기, 원데이 수업받은 이야기, 또 다른 맛집 정보 등을 나누었다. 어찌나 그 나이의 특징을 제대로 보여주는지. 그 와중에 어느 할아버지가 내 편견을 깨 주었다. 아이돌 음악이 들려오기에 젊은 사람일 줄 알았는데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내 옆을 지났다. 하긴 나도 록음악을 듣는데 할아버지라고 트로트만 들으란 법 없지. 왠지 마음이 갔다. 아이돌 음악도 좋지, 하면서.
여기까지 쓰고, 두 주가 지났다. 갑자기 아버님이 위독하시다고 연락을 받았다. 병원에 달려갔다 며칠 만에 다시 돌아오고, 그다음 주 결국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오래 요양원에 계시면서 힘들어하셨기 때문에 가족들 모두 편히 잘 쉬시라는 마음이 컸다. 사실 나는 장례를 치르는 게 처음이라 모든 과정이 다 놀라워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그 이야기는 따로 날 잡아 쓰려한다.
어쨌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빨리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동안 산에 다닌 모든 체력을 지난 두 주에 다 써버린 것처럼 몸이 힘들었다. 실은 한약을 먹으면서 특별식도 먹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게 아버님 보내드리는 걸 무사히 하기 위해 준비된 것만 같다.
그래도 오늘 산에 갔다. 덕주 사진 덕이다. 덕주가 산에서 맨발 걷기 한 사진을 올려줬고, 맨발 걷기가 얼마나 좋은지, 좋은 건 어떻게든 팬들에게 전하려고 애쓰기에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오늘 덕주는 안산에서 공연이지만.
산에는 오로지 푸름과 푸름을 뚫고 들어온 빛뿐이었다. 그동안 작은 꽃들이 눈에 띄었던 건 이만큼 푸르지 않아서였을까 싶게 꽃들도 별로 없었고, 오로지 푸르름으로 가득 찼다. 반짝반짝 나뭇잎이 빛났고 유난히 새들이 지저귀었다. 그들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허덕허덕 올라갔다. 도로아미타불이라더니, 내가 완전히 그렇게 된 듯 몸이 젖은 솜 같았다. 자꾸만 발이 땅을 끌었고 내발끼리 부딪쳤고 허리가 휘청거렸다. 인간의 직립보행이 얼마나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지, 손을 허리에 짚으면 그나마 버틸 만했다. 최소 목표지점 바로 아래인 구름다리쯤 가니 겨우 몸이 조금 가벼워졌고 걸음도 제대로 걸어졌다.
구름다리 바로 앞, 봄에 다래순을 발견한 그곳에 수국 같은 모양새인데 아직 몽글몽글한 몽우리만 모여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오늘 보니 보랏빛 산수국이다. 몇 개의 꽃잎만 활짝 피고 가운데 여전히 몽글몽글한데, 그것이 진짜 꽃이라지. 이럴 줄 알았으면 몽글몽글한 진짜 꽃을 줌인해 볼 걸 그랬다. 한번 눈에 띄면 그때부터 자꾸만 보이는 마법이 산수국에도 적용되면서 올라갈 때는 보지 못했던 산수국이 내려오는 내내 보였다.
지난번에 왔을 때만 해도 계곡물소리가 우렁찼는데 계곡이 바짝 말라있다. 곧 장마라는 게 다행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수관로 아래 낙엽이 가득하다. 장마 대비를 하고 있을 텐데 어째서 아직 낙엽을 치우지 않았을까. 얼마 전에 온 비에도 나무가 쓰러지고 이정표가 부서진 일이 있었다. 이번에는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신기한 게 계곡에는 물이 거의 없는데, 어떤 지점에는 물이 있다. 산길이 휘돌아 나오면서 얕은 계곡을 하나 건너야 하는데 항상 물이 졸졸 흘렀다. 크지 않은 돌멩이 몇 개를 밟아 건너곤 했는데, 신발이 젖지 않을 만큼의 얕은 물길이었다. 거기에 여전히 물이 자박자박하게 있다. 위쪽으로도 물이 별로 없고 아래로도 흘러내려가는 물이 보이지 않는데. 어쩌면 그 땅 아래에서 물이 샘솟는 게 아닐까, 생각한 순간 왠지 그 자리에는 여름에도 서늘하게 한기가 흐르는 신비한 공간일 것만 같다. 한여름에 산에 올 자신은 없지만 한 번쯤 확인해보고 싶다. 진짜 그런 곳이었으면. 뭔가 내가 발견한 공간이라는 기쁨이 있을 듯해서.
겨우 첫 쉼터까지 가서 앉으려고 보니 의자가 없다. 할 수없이 더 올라갔다. 의자가 나타나자마자 앉았다. 물 마시고 잠시 숨 돌리는 사이 다리 쪽으로 벌레들이 들러붙는다. 윽, 모기퇴치제를 안 바르고 왔다. 일부러 남원별꽃농장(믿고 쓰는 허브제품)에 주문해서 준비해 두었는데. 모자로 툭툭 치면서 신발을 벗고 땅을 밟아보았다. 덕주님이 말한 맨발 걷기를 여기서라도 해보려고. 황톳길이 잘 되어 있는 계족산도 있는데 굳이 여기서 이럴 일인가, 싶다가도 봄부터 꾸준히 다닌 이곳 식장산, 더구나 두 갈래로 갈라지는 등산로에서 지금껏 오른쪽 길만 고집해 온 등산로인데 이제 와서 다른 곳에 가고 싶지는 않다. 익숙한 곳에서 익숙지 않은 짓을 해보기. 이건 내 삶의 재미이기도 하다. 멍석 깔린 곳에서는 재미가 없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 기껏 맨발 걷기를 하면서도 나는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고야 만다.
잠시 걷고 조금 쉬다가 다시 더 오르기로 했다. 한 10여 미터 왔나. 멈췄다. 내려갈 일을 생각하자. 매번 내려갈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르다간 무릎 다치거나 종일 아무것도 못한다. 돌아서 내려왔다.
조금 아쉬웠다. 한동안 산행을 못할 거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면 바깥활동이 버겁다(나는 루프스가 있는데, 햇빛이 가장 큰 취약점이다). 다음날 종아리 딴딴해지도록 근육을 써보지 못하고 산행일지를 쓰면서 단 한 번도 능선 사진을 찍어 올리지도 못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매주 도착지점을 높여서 결국 능선을 타는 게 목표였는데. 가끔 욕심을 내고 싶다가도 나를 다그치지 말자고 포기한다.
얼마 전, 운전하다가 내가 화병이라는 걸 깨달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때문이었는데, 달콤하기만 하던 발라드가 짜증이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채널을 돌리자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록음악이 나왔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 속이 시원했다. 내가 국카스텐의 덕후여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항상 주변의 상황을 수용하며 사는 성격 때문이다. 내 우울의 근원이다. 그럴 때마다 산행을 선택하는 나를 발견한다. 갱년기 때문에 몹시 우울했을 때도 그랬다. 어느 날부터 매일 산에 갔다. 그랬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번에 다시 산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내 인생 처음 산행을 결심했다고 떠벌렸다. 앗, 그러고 보니 혼란스러웠던 이십 대에는 산악회 회원이기도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아무 소리도 듣지 않아도 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나를 품어주는 산에 기댈 수 있어 좋았다. 폭염을 피해 다시 산에 다녀야지. 봄 산행은 이걸로 마무리해야겠다.
그럼, 가을 산행일지도 기다려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