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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un 25. 2024

아버지의 뒷방

에세이 <요즘 덕후의 덕질로 철학하기>에 실은 글입니다. 책에 맞게 바꾼 결말 대신 원래 글을 이제야 올립니다. 기록용입니다. 



            

친정아버지가 자꾸 주무시기만 한다고 연락이 왔다. 

억지로 일으켜야 잠시 거실을 서성이고, 이내 소파에 앉아 꼬박꼬박 졸고 계시다는 것이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가 걱정된다기보다는 못마땅하신 듯했다. 아직 옷 욕심도 많고 좋은 음식점에도 가고 싶은 엄마로서는 아버지의 무기력이 끝내 당신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고 타박이신 게다.

아주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아버지의 꿈은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었다. 여섯 남매의 둘째였던 아버지는 맏형의 공부 수발을 위해 머슴처럼 일했다. 그런 아버지의 눈에는 사랑방에 가만히 앉아 쌀밥을 드시는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편해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환갑이 되자마자 상노인처럼 뒷방으로 물러나셨다. 시대는 아버지의 바람처럼 환갑을 노인으로 취급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허연 머리와 중절모를 내세워 노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노인이 되신 것을 훈장처럼 자랑스러워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할아버지처럼 종일 공자 왈 맹자 왈 한문책이나 쳐다보며 세월을 보내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노인대학에 갔다. 당연하게도 그곳에선 아무도 아버지를 노인으로 대해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평생을 걸려 겨우 늙어진 아버지에게 젊게 사는 법이나 시니어 일자리 등을 들이밀었다. 아버지는 도대체 마땅치가 않았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아무도 부르지 않는 종친회에 나가 당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다. 드디어 최고 어른이 되었지만, 종손이 중요한 그곳에서 맏이가 아닌 아버지는 원하는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남의 둘째는 아무 소용없다. 맏이여야 대접도 받고 뭐를 해도 당당하지.”

틈만 나면 그 말을 되뇌더니 딸 셋을 다 맏이에게 시집보냈다. 남들이 아무리 요새 세상에 종갓집이 웬 말이냐, 딸들 앞길 막는다고 야단을 해도 소용없었다. 어딜 가서도 어느 집안의 큰며느리가 내 여식이다, 라고 자랑삼았다. 박사를 하고 유학을 가는 다른 집 자식들 이야기에 그거 해서 뭐하냐고, 그래 봐야 공부한답시고 살아있는 조상도 모시지 않는 상놈들이라고, 오로지 조상 모시는 맏며느리 노릇이 사람 사는 도리 중 최고라는 당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엄마의 성화에 할 수 없이 친정에 들러 소파에 누워있는 아버지 손을 잡아끌었다. 

“아버지, 저랑 요 앞 약국까지만 걷다 와요.”

아버지는 마지못해 일어나기는 하지만, 결국 미적거리다 화장실로 피했다. 아버지는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성가셨을 것이다. 노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생이 이어지고 생이 이어지는 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현실이. 

어쩌면 아버지의 할아버지도 아버지가 보아왔던 것처럼 뒷방에 편히 계셨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인생에 뒷방이란 게 있을까. 남의 눈에는 뒷방에 있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본인은 허허벌판 홀로 서 있는 것,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남의 둘째 노릇이든, 밥벌이든, 공자 왈이든, 끝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무대 위 주연과 같은 것이 인간의 운명일 것이다.     

결국 아버지가 선택한 ‘무언가’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형제분들의 뜻을 모아 가묘를 만들고 수의를 맞추었다. 뭐 하러 벌써 그런 걸 준비하느냐는 자식들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는 마음을 다해 그 일을 추진했다. 그때 아버지는 더 이상 뒷방 늙은이가 아니었다. 예전 같은 활력을 되찾아 틈만 나면 장례 예절을 가르치려 들어 자식들을 귀찮게 했다. 그것이 늙음과 죽음일지라도, 살아있는 동안, 그 무엇으로라도 살아갈 이유를 붙잡고 행복을 느끼는 것, 어쩌면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것뿐일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간은 흘렀고 세월은 지나, 아버지는 팔순이 넘어 진짜 노인이 되었다. 생신날, 아버지는 편지를 하나 꺼내 들고 손주를 불러일으키더니 읽으라고 했다.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서......”

편지를 읽던 목소리가 그 뜻을 찾아 순간 흔들렸고 모두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내가 병에 걸렸을 때 치료가 불가능하고 죽음이 임박할 경우를 대비하여 나의 가족, 친척, 그리고 나의 치료를 맡고 있는 분들께 다음과 같이 저의 희망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죽음을 미루기 위한 연명치료를 일체 거부한다는 내용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언으로 아버지는 미처 자식들에게서 받아보지 못했던 ‘존경’이라는 것을 받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원하는 외모에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아있는 생, 아버지는 이제 무엇으로 살아갈까. 아버지는 어떤 마음일까. 충분히 늙었고, 오래 그 나이로 살았으니 드디어  아버지가 원하는 그곳에 닿았을까. 그곳이 이생 어딘가에 있기는 한 걸까. 

아버지가 무사히 잘 늙었기를 바란다. 그건 사실 아버지를 위해서라기보다 나를 위해서다. 내가 이미 그때 아버지 나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만큼 적극적이지 못한 나의 늙음이 과연 세상에 통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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