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컴퓨터 파일들을 정리하다가 <팬덤에서 자유로> 에필로그 원문을 발견했다. 책에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나눠서 짧게 줄여서 넣었다. 원문이 가진 느낌은 또 다르기에 옮겨본다.
참, 제목도 달랐는데 지금 생각해도 가제가 더 나았던 것 같다. 가제는 <광장에서 빛이 된 덕후들>.
내란의 밤, 나는 용인의 한 병원에 있었다. 둘째 아이가 며칠 전 척추에 금이 가서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하는 바람에 곁에서 간병을 했다. 4인실 병동은 초저녁부터 취침모드가 되어 있었고, 나도 종일 아이 뒤치다꺼리에 피곤해서 막 간이침대에 눕던 참이었다. 설핏 잠이 들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방해금지 모드로 설정해둔 핸드폰이 왜 울렸을까, 무슨 급한 일이 있나 싶어서(세 번 이상 전화를 하면 설정이 풀린다) 얼른 전화를 받았다. 낮에 문병을 왔다간 친구였다. 다른 환자들이 깰까봐 작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
야아, 어떡해? 계엄이래.
나는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뭐? 계엄, 계엄이라고. 친구는 계속 계엄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아직 잠이 덜 깬 기분이 들어서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이재명이 라이브하고 있어. 얼른 유튜브 켜봐. 우리 남편은 방금 국회로 갔어.
나는 이어폰을 찾아 더듬거렸다. 나는 친구에게 말도 없이 전화를 끊고 유튜브를 켰다. 껌껌한 화면 속에서 이재명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그제야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직감했다. 나는 숨도 못 쉬고 얼어붙었다. 얼굴의 핏기가 쭉 빠져나가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자, 본능적으로 척추가 부러져 누워있는 저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도망갈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궁리를 한다고 대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건 말 그대로 본능이었다. 젊어서 학생운동을 할 때도 시위에 나가면 겁쟁이인 나는 싸울 생각보다 어디론가 숨을 궁리를 먼저 했다. 보도블럭을 깨고 던지고 구호를 외치면서도 문 열린 빌딩과 주변의 골목 쪽으로 온 신경이 가있었다. 이번에도 나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어디론가 고개를 처박고 숨을 생각만 했다. 국회로 와달라는 이재명의 외침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나의 안위를 걱정했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피난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허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까. 휠체어도 타지 못하니 침대채로 밀고 가야 하나, 엘리베이터가 멈추면 계단으로는 그 어디에도 갈 수 없는데, 무사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해도 도로에는 수많은 턱이 있을 것이고 어찌저찌 대피소까지 간다고 해도 지하에는 내려가지 못할 텐데, 이런 생각이 순식간에 마구마구 떠올랐다.
동시에 머릿속 한편에 마침 아이가 허리를 다쳐서 국회로 달려가지 않아도 되겠구나, 적당한 핑계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다시 유튜브를 보니, 국회의원들이 국회 담을 넘고 있었고, 경찰이 그 앞을 막고, 헬리콥터가 오고, 창문을 부수고 몸싸움을 했다. 아수라장이었고 위험천만한 장면들이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국회의원들이 정족수를 채우고, 우원식 국회의장이 계엄해제를 위해 의장석에 서서 안건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순간, 혹시 국회의사당 위로 폭탄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국회의원들을 다 모아놓고 한번에 제거하려는 수작일지도 몰라! 머리가 쭈뼛하게 섰다. 한번 그렇게 생각하자 진짜일 것만 같았다. 이 사실을 빨리 알려 도망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도망치게 하는 게 먼저인지, 계엄해제가 먼저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도망치라고 전할 방법도 없으면서 왠지 내가 그 말을 전하지 않아 진짜 무슨 일이 생길까봐 안절부절못했다. 또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유튜브로 생중계될 텐데 그 아비규환을 내 눈으로 보게 될 것이 상상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그런 온갖 무서운 추측으로 뇌가 정지할 것 같은 십여 분이 흘러 드디어 계엄해제가 되었다. 그제야 긴 숨이 터져 나왔다. 서서히 군인들이 물러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꼭 쥐고 있던 주먹과 오그라들었던 어깨와 허리, 미간을 조금씩 풀었다. 그 뒤에도 한참을 잠이 들지 못하고 유튜브와 트위터를 오가며 소식을 살폈다. 무사하다는 안도감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곁에서 나와 같이 뉴스를 보던 아이가 그곳에 투입된 군인을 유심히 보더니 얼마 전 자신이 제대한 부대임을 알아차렸다. 아는 얼굴, 아는 복장, 아는 행동거지였다. 아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는 사람들이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다니. 함께 훈련받고 생활했던 동기들이 내란범이라 불리게 되다니. 아이는 6개월 정도 단기하사로 복무할까 고민했었다. 모든 훈련을 너무 잘했고 인정도 받았기 때문에 군인으로서 자부심이 컸다.
만약 남았더라면, 남아서 잘한다고 차출이라도 되었다면, 어쩌면 아이도 저 내란에 끌려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날 병동은 어제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의사가 회진을 하고 간호사들이 종종거리며 병동을 뛰어다니고 보호자들은 묵묵히 환자를 돌봤다. 나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들이댔는데 어떻게 어제와 똑같이 자신의 일을 이어갈 수 있는지, 아직도 국회 앞에는 또다시 군인과 경찰이 쳐들어올까봐 맨몸으로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어제와 똑같이 얌전히 치료를 받고 복도를 어슬렁거리다 잠들 수 있는지.
나는 당시 청소년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병원에 와서도 수시로 노트북을 들고 탕비실로 가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어졌다. 뭘 쓰려 했는지 다 잊어버리고, 뉴스만 계속 확인했다. 새로운 소식을 찾아 새로고침을 하고 새로고침을 하고.
살만큼 살았으니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70대 어르신들이 국회 앞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장갑차 앞을 막아선 사람이 내 아이 또래라는 것도 알았다. 그 밤에 국회로 달려간 사람도, 다음날 밤샌 이들과 교대해주고 국회 담장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사람도 내 이웃들이었다는 걸 이글을 쓰면서 알았다.
12월 7일, 나는 대전 광장에 앉아있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가결될 거라 생각했다. 한줌 국힘당 놈들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막아설 수는 없을 거라고, 아무리 그놈들이 불한당 같아도 이처럼 거대한 여론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게 되어있다고 큰소리쳤다. 한때 민주화운동을 했던 세대로서 감이라는 게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들은 집단 불참으로 투표를 불성립시켰다. 내가 아는 상식, 내가 살아온 경험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완전히 다른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나는 삶을 통째로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불성립 선언을 보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돌아 나왔다. 그때만 해도 무대에 전광판이 없어서 누군가의 태블릿 주변을 둘러서있던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흩어졌다. 나처럼 늙수그레한 이들이었다. 속에서 천불이 났다.
그런데 다음날 홍사훈 기자의 쇼츠 영상이 돌았다. 실망해서 돌아가려던 참에 응원봉을 든 2030 젊은 세대들이 자리를 지키는 장면이었다. 홍사훈 기자는 “여기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며 “우리가 세상을 지킨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꼰대들의 착각이었고, 세상을 바꾸는 건 결국 젊은 세대들”이라며 울컥했다. 나는 그것을 돌려보고 돌려봤다. 박차고 나온 것을 후회했다. 조금만 더 버텼으면 젊은 2030들이 괜찮아, 또 하면 돼, 어차피 탄핵될 거야, 신나게 응원봉을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앞서 살아봤다고 앞날을 예측하고 자만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뭘 안다고 확신하고, 뭘 했다고 절망한 건지. 나는 다소곳이 고개 숙이며 겸손해지기로 했다.
남태령은 나를 더, 더 납작하게 엎드리게 만들었다. 덕질 덕분에 트위터에 익숙해있었다. 내란 관련 소식도 당연히 제일 빠르게 접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내내 트위터를 지켜보았다. 누군가 상여투쟁에 대한 글을 올린 것을 봤고 전농 트랙터가 올라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른바 전봉준 투쟁단이라고 했다. 행진의 경로가 수시로 업데이트 되었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쯤에서부터 멈춰버렸고, 폭력적으로 진압을 당하고 있다고 했다. 그 순간 트위터의 흐름이 예사롭지 않았다. 덕질계정이니 당연히 덕후들 뿐이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시민들’(덕후가 시민이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덕후 정체성이 아니라 100% 시민 정체성으로 돌변했다는 뜻입니다.)이 광장으로 뛰쳐나왔다. 마치 트위터 화면을 뚫고 광장으로 바로 뛰쳐나왔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다시 누군가가 생중계 링크를 올려주었고, 나는 거기로 흘러들어가 밤새도록, 다음날까지 유튜브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지금이라도 올라가야 하나, 들썩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짓달 추위에 결국 의지가 꺾여 주저앉았지만, 마음은 점점 뜨거워졌다. 저건 혁명이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왜 혁명이라고 생각했는지 무슨 혁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혁명이라고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마음이 미친 듯이 들떴다. 혁명을 눈으로 생생하게 보고 있는데 어떻게 들뜨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남태령은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었다. 돌봄과 연대를 실천하는 시민의 탄생이었다. 소수자들의 전유물이었던 돌봄과 연대가 남태령이라는 공간에서 발현되면서 전사회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탄핵국면으로서 6개월은 꽤 길었지만, 시민의식으로 다져지기에 꼭 필요한 시간이기는 했다.
새로운 세계라고 했지만 이미 소수자들에 의해 오래 축적되고 예비된 세계, 먼저 감각한 이들이 갈망하며 가꿔온 ‘다시 만날 세계’였다.
또, 남태령은 시민들이 스스로 시민으로서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권자로서, 시민으로 살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주권자로서의 인식이 턱없이 부족해서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권리와 해야 할 의무 등 그 무엇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언제 흩어져 날아갈지 모르는 모래성과 같았다. 일상에서 협의와 합의를 경험하지 못했고, 오로지 다수결과 투표로 간신히 민주주의라고 우기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남태령에서 우리는 스스로 주권자임을 알아챘고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성별·성적지향·성별정체성·장애·연령·국적 등에 관계없이 모두가 동등한 참여자입니다. 모든 참여자는 여성·성소수자·장애인·청소년·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대상화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시민들은 광장의 인사법, 모두의 약속을 만들어냈다. 이번 탄핵 광장에서 응원봉, 2030여성, 성소수자만큼 많이 회자된 것이 바로 평등한 집회를 위한 모두의 약속일 것이다. 주체화된 시민은 이제 시민정치의 실험장이 된 광장에서 공공선을 지키는 사회대개혁을 이루자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로도 내가 발견한 혁명에 대한 해석을 찾아 헤맸다. 특히 덕후를 주목한 건, 2030여성들의 문화적 특성 중 덕질을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덕후들은 광장으로 뛰어나왔는가.’ ‘왜 덕후들이 정치문제에 민감한가.’ 라는 두 가지 질문이 내게는 있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다양한 의견을 들었지만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중요한 건 그들이 광장에서 얼마나 빛나고 있는지, 어디로 향하는지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덕후들도 이제야 광장에 나온 게 아니라 여성이나 성소수자들처럼 마침내 인식된 것뿐이었다. 심지어 덕후인 나에게조차.
돌이켜보면, 우리는 언제나 광장에 서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스타를 엔터 시스템이 멋대로 조작할 때, 우리의 사랑을 지나친 상술로 후려칠 때, 내 사랑이 소속사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당할 때... 그러니까 우리는 덕질을 하면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난 덕질 대상을 조건 없이 사랑하고 무작정 좋아하고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나의 사랑이기에 대상의 반응과 무관하게 스스로를 응원하고, 나의 사랑이기에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나의 사랑이기에 내가 정한 원칙에 맞지 않으면 바로 되돌아설 줄도 안다. 차별과 배제를 참지 않고 불공정하고 부정의한 방식에 항의할 줄 안다. 그 과정에서 빛났던 순간들을 잊지 않고 사유하며, 만난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견실함을 갖춘다.
무용하고 무의미한 것을 사랑하는 우리는 유용하고 쓸모있는 것들 사이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개별적이고 연약한 존재들이 서로 포개어져있음을 자각했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서로를 돌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정하고 동등한 관계 속에서만이 안전하고 살만한 공동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감각했다.
감각된 경험은 정치가 선을 넘는 순간에 가차없이 참견하고 항의하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국가가 폭력적으로 우리의 권리를 침탈한다면 싸워야 한다는 것,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무너지게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우리는 당장 광장을 열고, 스스로 광장의 주인이 되어 서로를 환대했다. 베풀고 나누고 존중하고 돌보았다. 할머니들이 맑은 샘물을 길어와 새벽 치성을 드리듯 하얗게 눈을 맞으며 마음을 모았다.
그럼에도 세상은 맹목적인 사랑을 한다는 이유로 우리를 손가락질했고 비웃었다. 우리는 사소하고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었다. 수시로 무시하고 공격하고 때로는 선을 넘었다. 그것은 폭력이었다.
우리는 자신이 겪은 고통의 감각을 잊지 않고 남의 고통에 맞대어 아파하고 얽히어 ‘내가 00다’로 대변하는 연결의 신호를 보냈다. 사회적으로 약하고 불안한 존재들이 연대하고 돌보며 진짜 정치를 생성해냈다. 3인칭의 세계에 각자 흩어져 있던 이들이 1인칭이 되어 곁을 나누었다. 우리에게는 오랫동안 갈망하며 생존해온 세계가 축적되어 있었다. 그것은 주로 덕질 안에 있었고, 덕질과 중첩되어 있었다. 우리의 세계는 광장에서 충돌하며 확장되었다.
지금까지의 정의는 대의라는 신념과 단일대오로 짜여져 있다면, 이제부터의 정의는 개인적이고 사소한 삶의 서사로부터 더 낮고 깊고 넓게 뻗어나가 예민하고 섬세하게 보듬고 느슨하고도 자유롭게 다져갈 것이다.
국회 앞으로 달려가고, 남태령을 뚫고, 한강진에서 눈을 뒤집어쓰고 앉아있던 이들, 이후 파면선고가 날 때까지 경복궁 앞을 가득 채운 수많은 시민들에게 나는 말 그대로 엎드려 절하고 싶다. 지금도 말벌동지가 되어 투쟁현장을 달려가는 시민들에게 경외감을 느낀다. 내게는 그들이 일제하 독립군이며 광주의 시민군이다.
고백하자면, 나의 엄마는 극우다. 연세가 많으셔서 탄핵반대광장에 나가지는 못했지만 마음은 언제나 거기에 가있었고 부지런히 그들의 말을 실어다 날랐다. 대구출신이지만 대구를 떠나온 지 70년이 넘었는데 왜 엄마는 여전히 그곳의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할까. 나는 그게 계급제도를 받아들이지 못한 탓으로 본다.
엄마는 여태 양반타령을 한다. 가문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신분에 대한 우월감이 하늘을 찌른다. 계급타파라는 시대적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언제나 억울해하고 분노에 차있었다.
엄마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도 인정하지 못했다. 계급제도도 넘어서지 못했는데, 민주화라는 변곡점을 넘었겠는가. 엄마는 호남이라는 낙인과 상고출신이라는 비하로 일관했다. 정작 엄마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으면서.
‘TK의 딸’과 달리 나는 정치에 관련해서는 엄마를 포기했다. 엄마가 보내오는 카톡 글을 신고하다 지쳐 가족 단톡방을 나와 버렸다. 엄마 스스로 넘어서지 못한 벽을 내가 넘겨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들이 벽 앞에 멈춰 섰다. 이준석에게 호감을 표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는 모른다. 성인이고 비밀선거니까 모르는 거기도 하지만, 사실은 무서워서 물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왜 그럴까 죄의식을 갖지 않기 위해 아들을 분리해내려 한다. 엄마를 분리하듯이. 티브이 토론회를 보고 마음을 바꿨으리라 믿을 뿐이다.
그러니까 2030여성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도 망했겠지만 나도 망했을 거다. 어쩌면 아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서서히 우경화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대남이라는 꼬리표로 배제와 낙인 짓기보다는 남성에 대한 이해와 노력이 먼저라는 분위기에 나는 반대한다. 여성들은 어떻게 각자도생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넘어서서 각성되고 광장에 나오고 연결되었는지에 더 주목하기를 바란다. 진짜 배제당한 것은 여성인데 왜 기득권을 가진 그들이 피해의식에 갇혀 사는지 모르겠다. 아니, 모를 것도 없다. 그들은 외면한 거다. 강자의 이익이라는 이데올로기에 포획되어 누구나 언제든 취약한 몸이 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다. 약자가 되느니 퇴보하기로 작정한 거다.
나는 시대적 변화를 넘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아 자기기만에 빠진 고집쟁이들에게 나눠줄 에너지가 없다. 그럴 에너지가 있다면 광장을 열었다는 이유만으로 공권력이 불러대고 세무감사를 받는 현실에서도 머뭇거리지 않고 행동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을 응원하는 데 쓰겠다. 적어도 지금은, 공공선을 지키는 공화정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더 용기 있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그들이 사회적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힘쓰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대선 결과, 4050들의 압도적 지지에 대한 감사와 찬사가 넘쳐났다. 나도 거기에 속한다는 데 자부심을 느끼고, 자긍심을 가지려 한다. 함께 시대적 파고를 넘어설 수 있게 해준 인터뷰이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들의 말을 적어 내려갈 수 있어서 진심으로 영광이었다.
<원래 프롤로그>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울 땐 아름다운 쪽을 택하면 대체로 옳다. 집회 현장을 가보라. 어디가 아름다운가."
비현실적인 탄핵정국을 지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운 순간, 아름다운 광경을 자주 접한다. 가슴 벅차게 끓어오르는 광장의 모습을 보면서 묘하게 덕질 문화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나뿐일까. 덕후들은 원래 타임라인에 덕질 말고 쓸데없는(!) 정치 글이 보이는 걸 정말 싫어한다. 그런데 이번 계엄에는 누구보다 빨리, 누구보다 앞장서서 탄핵을 외치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 내 덕질을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낀 것이다.
매일 또는 매주 집회가 시작되자 SNS에서는 덕후들의 정치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수많은 집회 가이드가 만들어졌다. 집회 준비물 및 착장이라든지, 화장실 참는 법이라든지, 민중가요 추천타래라든지...‘빠순이가 집회에 최적화된 이유’라는 글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요즘 덕후의 덕질로 철학하기>(초록비책공방)라는 책을 낸 덕후로서 그런 덕후들의 참전(참여)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광장에 나가면서도 나는 덕후들의 점진적인 변화를 지켜보기 위해 SNS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빛의 혁명이라 불리고 깃발의 바다가 펼쳐지는 광장은 서울뿐 아니라 지역 여기저기에서도 가열차게 열리고 있었다. 청년과 여성과 퀴어와 노동자와 가족과 6.10세대와 덕후들이 응원봉과 깃발을 흔들고 있었고, 시민발언이 끊이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민주화를 이루어오는 과정에서 수많은 광장이 있어왔지만, 오늘의 광장은 이전과는 또 다른 민주주의를 ‘발명’해내고 있었다.
파면을 앞둔 시점이 되자 나는 불현듯 지금의 광장이 이대로 사라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예전의 ‘나’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각성된 나, 더 이상 정치를 외면하지 않을 나, 연대하고 연결되는 나로 살아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이 뜨거운 무언가의 정체를 한번쯤 돌아보고 나눠봐야 하지 않을까, 서로가 느낀 것들을 내어놓고 모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무얼 하지?
나는 글 쓰는 사람이고, 기록을 할 수 있지. 이들의 말이 지워지지 않게 기억하고 기록하고 해석하고 싶다. 기왕이면 덕후로서 내가 포착한 덕질문화와 정치의 만남을 기록하는 게 좋았다. 덕후들의 순정한 마음, 다른 게 끼어들지 않은 오롯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부정하고 혼탁하고 광기어린 현실일수록 좋은 사람, 좋은 목소리, 좋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자.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자. 덕후는 어떻게 광장으로 나오게 되었는지 기록하자. 뻐렁치는(?) 감동을 전하자.
그렇게 #광장에선덕후들 #탄핵을넘어 #우리가염원하는세상 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인터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