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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뷴 Aug 21. 2024

아빠와 아들의 2박 3일-부산

돼지국밥

여름휴가 첫날 아침 벌어진 해프닝을 직장 동료한테 얘기했더니, 의외의 답을 들었다. 그 해프닝이란 게 이렇다.


1. 재수생 딸을 아침 일찍 학원에 카카오 택시 태워 보냄

2. 남은 가족(아빠, 엄마, 고등학생 아들)은 부산행 SRT 타러 수서역에 가야 함

3. 카카오 택시를 한대 더 부르려고 보니, 아직 딸이 가고 있어서 택시를 부르지 못함 (발 동동)

4. 아내에게 택시를 부르라고 하자, 카카오 택시를 써본 적이 없고, 앱 까는 것도 오래 걸려 결국 기차는 떠나보냄 (남편은 애써 진정 중)

5. 운전해서 부산까지 이동하려 했으나, 아들의 의견제시로 결국 버스 타고 가기로 함


여기까지다. 그런데 회사 동료 말이 카카오 택시에 "멀티 호출"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부른 첫 번째 택시가 한창 가고 있더라도, 화면 가운데 "서비스 추가하기" 버튼을 누르면 추가로 택시를 5대나 부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모르고 아침부터 난리를 쳤다. 그런데, "택시 추가로 부르기"가 더 직관적이고 편한 메뉴명이지 않을까?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향한다. 5시간이 걸리는 긴 여정이 되어버렸지만, 의자를 뒤로 한껏 제치고, 고속열차보다는 한참 느린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휴게소에서 주전부리를 사 먹으며 우리 가족은 슬슬 여행을 실감하기 시작한다. 아들 역시 설레는지 말수가 늘기 시작했다. 부산에 도착하면 첫 목적지는 “감천문화마을”이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대거 부산에 몰려왔고, 평지에는 살 공간이 부족하여 급기야 산비탈에 까지 마을이 생겼다. 사하구 감천동이다. 울긋불긋한 집들이 다닥다닥 모여있는 풍경이 관광객들의 흥미를 이끄는 곳이다. 한편으로는 감천문화마을의 일상이 고된 거주민들 중에는 정작 떠나고 싶은 이들이 많다고도 들었다.


@감천문화마을 홈페이지


"안녕하세요? 부산시 문화관광해설사 이**입니다. 감천문화마을 해설 신청하셨죠? 3시에 문화마을입구 안내소 앞에서 뵙겠습니다."


친절하게도 문자가 온다. 부지런히 가면 늦지 않게 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부산에 도착할 무렵 문자가 하나 더 온다. “해설사입니다. 폭염으로 3시 해설은 취소되었습니다."


허...이번 여행은 왠지 계획대로 진행될 것 같지가 않다. 갑자기 일정이 비었다. “아들 뭐 할까?” 아들의 대답은 간단하다. “밥”


그래 식구끼리 모여 앉아 먹는 밥, 어쩌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 아닐까? 예수님도 딴데도 아닌 최후의 만찬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시지 않았는가? 아들한테 뭐 먹고 싶냐고 물었다. 아들은 의외로 곧바로 대답한다.


"나, 돼지국밥 못 먹어 봤어.“


내가 아는 부산 제일의 돼지국밥집은 부산역 바로 옆에 있는 ”본전 돼지국밥“이다. 젊은 시절 나의 사수이자, 지금도 절친한 회사 선배가 있다. 그는 부산 토박이다. 십수 년 전 부산에 저축은행 사태가 터져 시끄러울 때, 그와 함께 부산에 출장을 왔다. 부산역에 내려 출출함에 두리번 거리던 나를 데리고 간 곳이 본전 돼지국밥이었다. 깔끔한 하동관 한우 곰탕을 좋아하는 나다. 돼지국밥은 내 입에 영 맞지 않는 음식이었는데, 그날의 돼지국밥은 신세계였다. 서울에서 가끔 먹는 프랜차이즈 돼지국밥하고는 달랐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여기 돼지국밥 주이소"하는 정겨운 사투리가 부산에 왔음을 실감케 했다. 무엇보다 돼지국밥의 느끼함이 싹 달아난 국물이었다.


영화 "변호인"에서 공사판 막노동꾼이자 사법고시생 송강호는 어려운 형편에 든든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메뉴를 찾는다. 부산의 돼지국밥이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는 가족들과 함께 국밥집 주인이었던 김영애를 찾아온다. “아지매, 7년 전 밥 먹고 도망간 제가 변호사 되어 밀린 국밥 값 내러 왔습니데이.”하며 봉투를 꺼낸 것이다.


김영애는 찾아와 준 송강호가 그저 고맙고 반갑다. “문디자슥아, 자고로 밀린 빚은 얼굴하고 발로 갚는 기라.”하며 그의 등을 후려친다. 덕분에 사무장 오달수는 허구한 날 돼지국밥만 먹는 국밥충이 되어야 했다. 영화를 보며 나는 이 장면에서 울컥했다. 장수 고시생이었던 나의 과거가 떠오르기도 했고, 자식의 1차 시험 합격과 낙방 소식을 번갈아 들어가며 몇 년간 뒷바라지하던 부모님 생각에 고개가 숙여졌으며, 무엇보다도 불투명한 미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곁에 있어준 당시의 여자친구이자 아내가 고마웠다.


기차를 타고 왔으면 편안히 걸어갔을 부산역 "본전 돼지국밥"인데, 이날은 버스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갔다. 점심이 한참 지난 3시가 가까운 시간임에도 밖에는 대기 줄이 있다. 안에 들어서자 예전의 그 부산 사투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약간의 불친절함과 부지런한 직원들의 모습은 그대로다. 먼저 양파, 풋고추, 김치와 부추절임이 식탁에 오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국밥이 올라온다. 숟가락을 넣어 후후 불고 한입 먹어본다. 십 년도 넘었는데, 맛이 변함없다. 아내도, 아들도 맛있나 보다. 식구들의 얼굴이 모두 환해진다.

부산에서의 2박 3일이 기대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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