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퀀텀 오브 솔러스와 오페라 토스카
*회사 게시판에 올렸던 글이어서 높임말이다. 시간은 흘렀어도 공유할 만한 글이다 싶어 올려본다.
007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바로 퀀텀 오브 솔러스. 무슨 뜻 이래? 사전을 뒤지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수입사는 극한의 액션 블럭버스터라고 자랑하고 있으나, 보고 난 소감. Killing time은 잘되는데, 본드 시리즈 특유의 앙꼬가 없다입니다.
과거 이언 플레밍 원작의 본드 시리즈는 대대로 기본 설정이 있었습니다. 007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따라서 숀 코네리, 조지 라젠비, 로저 무어, 티모시 달튼, 피어스 브로스넌 등 역대 본드를 두루 섭렵한 바, 모두 공통점이 있지요. 바로 영국 악센트, 양복빨과 후까시, 그리고 본드 걸입니다. 그런데 전편인 카지노 로얄 때부터 외모부터가 좀 아니다 싶은 대니얼 크레이그가 본드로 나오더니,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을 펼쳐 보이며, "나 본드가 아니고 본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맷 데이먼 주연의 본 시리즈를 보신 분은 이해가 가능할 겁니다. 더구나 옛 애인을 못 잊고 이성에게 별다른 관심도 없는 본드가 등장하니 이건 앙꼬가 없어도 한참 없는 설정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저에게는 놀라운 수작입니다.
영화 속에서 바로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를 즐길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해마다 오스트리아 브리겐츠에서는 호수 위에서 오페라 무대가 펼쳐집니다. 거대한 야외무대 앞자리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기 시작하면 어느새 무대 뒤 호수 너머로 노을이 지고, 아름다운 유람선이 도착하면 한 무리의 관객들이 내리지요. 그리고 어둠 속에서 휘황찬란한 오페라가 시작됩니다. 생각만 해도 멋진 광경입니다. 2008년도 브리겐츠 페스티벌의 실제 상연작은 토스카입니다. 007은 바로 이 토스카 관객으로 위장하여 모종의 거래를 하러 온 검은 무리들을 뒤쫓습니다. 영화 속의 토스카는 악역인 스카르피아가 부르는 "Va Tosca"로 시작합니다. 오페라 토스카에는 주인공이 셋인데, 가수인 여주인공 토스카와 그의 애인이자 화가인 카바라도시,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경찰서장 격인 스카르피아입니다. 남주인공 카바라도시는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가 나폴레옹의 도움으로 독립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친구 안첼로티를 도와주면서 반역범으로 몰리게 되지요. 스카르피아가 카바라도시를 죽이고 그의 연인 토스카를 품에 안을 상상을 하며 부르는 노래가 바로 "Va, Tosca"입니다.
"가라 토스카, 이제 스카르피아는 네 가슴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나는 지금 두 개의 목표를 겨냥하고 있다. 네 애인은 교수대로, 그리고 너는 내 품으로. 토스카, 널 위하여 이 스카르피아는 천국도 버렸도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테 데움(Te Deum) 속에서 전혀 반대로 울려 퍼지는 음습한 노랫가락은 셔를 밀른즈 같은 바리톤이 부르면 진저리가 쳐질 정도입니다.
영화 속의 무대를 캡처해봤습니다. 커다란 눈동자가 인상적입니다. 1막이 오르자마자 주인공 카바라도시가 성당에서 그리던 그림이 막달라 마리아의 눈입니다. 토스카는 이 눈을 보고 카바라도시의 마음속에 다른 여인이 있다는 의심과 질투를 하게 되지요. 오페라 무대 위의 이 눈은 주인공과 관객을 바라봄과 동시에 무대 위 주인공을 확대해서 비춰주는 다의적인 장치로 쓰입니다.
토스카는 비극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질투, 그리고 헛된 신념과 믿음으로 두 주인공 모두가 하루 만에 죽음에 이르게 되지요. 전편인 카지노 로얄에서 본드는 베스퍼라는 여자 요원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를 잃습니다. 그리고 금번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그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실행하게 되는 것이지요. 첩보영화는 실상 믿음과 이에 대한 배신 그리고 폭력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서 전개되지 않던가요? 그런 면에서 오페라 토스카는 매우 훌륭한 복선이었습니다.
퀀텀 오브 솔러스는 따지고 보면 수작입니다. 문제는 "극한의 액션 블럭버스터"를 누가 따지고 보겠느냐는 것이겠지요.
아래 링크는 제가 좋아하는 바리톤 브린 터펠이 부르는 "가라, 토스카"입니다. 007과 같은 영국 출신으로 선정했습니다. 눈빛과 목소리가 스카르피아가 현현한 듯하여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