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쓴 예술에 대한 잡소리
비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술에 관심이 많다. 정확히 말하면 사진과 음악을 좋아하는 취향이 확고하고, 스스로를 사진 한다, 음악 한다고 소개하는(소위 아티스트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다(솔직히 말하면 냉소적이다).
나에게 사진과 음악은 지극히 자기만족의 카테고리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예술에 목적성이 개입하는 것에 부정적인 생각이 많았다. 예술은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하며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목표도 담고 있어서는 안 되고, 그 어떤 감정적인 조작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벌써 3년은 된 거 같은데) 친구한테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래에 사람의 감정을 풍부하게 해주는 약이 개발되어 이 약을 복용한 무명작가에 의해, 소위 말하는 masterpiece가 탄생한다면 이것은 예술일까?'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동의할 수 없었다. 감정의 조작이 들어가는 순간 예술의 고결함을 잃는다는 게 당시의 내 생각이었다. 친구와 나 둘 다 전공자가 아니었고 어느 한쪽이 더 깊이 있는 지식을 갖고 있는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날의 이야기는 결론 없이 끝났다.
그 날 이후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했고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1 당연히 예술이다. 예술이란 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holy 하고 순수한 면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더럽고, 추악한 면도 많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감정에 취하기 위해 술을 먹고, 마약을 하고, 섹스를 하고 스스로가 가장 드라마틱한 사람이길 의도적으로 원한다. 이런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또한 패러다임의 파격이라고 볼 수도 있다. 뒤샹의 샘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깨면서 지극히 새로운 하나의 패러다임을 만들어 냈듯이 그런 약이 있다면 그 약을 먹고 그린 작품들이 또 하나의 패러다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2 요즘엔 경제적 가치가 개입된 것이든 정치적 색깔을 넣은 작품이든 '인간의 본질'보다 '작가의 의도'가 잘 드러난 것이 좋은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작가의 의도 안에 인간의 순수한 본질이라는 카테고리도 있겠지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술이라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순수'를 훼손하는 그 자체가 예술이 되는 카테고리도 있고요(종교화가 유행하던 시절에 신성모독을 주제로 하는 작가도 그 예가 될 수 있죠. 독창적인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금기시되고 신성화되며 남들이 두려워하는 분야를 깨고 뒤집어 생각하며 이를 개척하는 용기가 중요하다 생각함). 즉 작가 혹은 관객이 원한다면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해요. 오빠가 생각하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본질이 더 설명되어야 할 것 같아요. 아마 얘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특정 작가나 시대적 흐름으로 설명될지도? 뭐 근데 오빠 말대로 정답은 없죠. 개인적 의견이라 할지라도 예술을 정의하는 건 정말 너무너무 어렵고 예민한 문제 같아요. 근데 그런 건 있더라고요. 지금 미술이 너무 이 방향 저 방향으로 흩뿌려지니까 과거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따뜻하게 그려졌던 순수한 그림 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경향이.. 그래서 팝아트 이후 세계 미술 경향이 미국 특히 뉴욕 쪽으로 쏠리다가 그런 작품류에 질려 다시 중심이 아카데믹한 유럽 쪽으로 흔들리고 있다네요.
#3 그 캡슐을 먹는다고 하여, 모두 소위 말하는 걸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니, 전 그것도 예술일 거 같네요. 스테로이드 쓰는 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비슷할 거 같은데, 스테로이드를 먹는다고 해도, 자기가 죽을 듯이 운동하지 않으면 그런 몸이 만들어지지도 유지되지도 않는다고 누가 인터뷰했던걸 봤었거든요. 물론 위에서 말하는 캡슐을 먹지 않고도 걸작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도 있겠지만, 빌 게이츠도 이야기했고,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그 캡슐이라는 게 존재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그 예술가의 운이라고 생각해요.
#4 그것도 '예술이다'에 한표! 작품은 오로지 작품 그 자체만을 두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떠한 외적 정보도 배제한 채 말이죠. 사실 관객의 입장에선 화가가 약을 먹고 그렸다는 정보를 알지 못하면 오히려 작품을 대할 때 편견 없이 순수하게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다고 봅니다. 약을 먹고 그렸다는 그러한 '외적 정보'가 더해지면 관객이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의미부여를 하고 자기만의 방법대로 해석해보려고 하는 행위가 가장 본질적인 예술의 재미이기도 하고요.
생각을 키워나가던 중에 이런 작가도 알게 됐다. 미국 태생의 Bryan Lewis Saunders는 자신의 환경에 극적인 변화를 주기 위해 매일 다른 종류의 drug 혹은 intoxicant를 복용하고 자화상을 그렸왔으며 이를 하나의 시리즈로 만들었다.
http://bryanlewissaunders.org/drugs/
약의 종류에 따라 발랄하고 유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속이 울렁거릴 만큼 극도의 우울감을 보이기도 한다(솔직히 말하면 일반적인 정서를 가진 사람에겐 불편한 그림이 많으며, 작가 역시 이 series에 대해 'Near Death Experience'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감정을 풍부하게 해주는 약'을 먹고 예술하는 사람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우리의 질문은 미래에 대한 고민보다는 현재 진행형에 가까웠다(참고로 Bryan Lewis Saunders의 작품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terrifying 하지만 상당히 impressive 하고 계속해서 이 프로젝트를 보고 싶다'라는 식이었다. 작가는 이 프로젝트로 인해 mild 한 brain damage를 입었고 지금은 이 프로젝트를 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drug=감정을 풍부하게 하는 약인가'에 대한 문제, 그리고 이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 또한 고민해봐야겠지만 또 다른 카테고리로 생각하고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이런 대화와 조사를 통해 나의 예술관에도 변화가 생겼다. 여전히 어려운 이야기지만, 예술을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순수성’보다는 ‘창조성’이라는 주제가 우선시 되어야 할 것 같다. 창조성에는 '순수성'도 포함될 수 있고 어떤 목적이 개입할 수도 있다. 모든 작가는 창작을 위한 일련의 고뇌를 거치며, 관객은 고뇌의 결과물만 보고 판단한다. 하지만 하나의 가설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를 증명하는 논리적인 과정이 중요한 것처럼, 예술가들의 창작활동도 작품이라는 결과물뿐 아니라 창작의 과정을 알고 보면 더욱 '예술적'이다. '영감의 원천이 무엇이 되었든 만들어내고 표현하는 욕구는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 있다'가 조금은 더 현명한 판단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