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의 나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와 함께 1학년이 시작되었다.
나의 국민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100원짜리 카스테라가 먼저 떠오른다.
시골에서 상경한 지 2년 차
우리 가족은 아직도 단칸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큰언니는 일찍이 취직을 해서 기숙사 딸린 방에서 기거하고 있었고, 오빠는 그나마 다락이 딸린 집이라 자기만의 작고 소중한 아지트가 있었다.
내 위에 둘째 셋째 언니는 연년생이라 학창 시절을 거의 비슷하게 보내고 있었다.
엄마는 서울로 올라오기 전부터 이미 아는 사람 소개로 서울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사실 우리가 서울로 올라오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바로 엄마의 장사 때문이었다.
시골에서 허리 필 시간 없이 농사를 지었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게 우리 소유의 밭이나 논이 그리 크지 않음 때문도 있었겠지만, 아빠의 노름과 게으름의 원인이 더 크지 않나 싶다.
해가 일찍 지는 시골 전라도 끝자락, 농한기 때 농촌은 한가하다.
지금 시골에서는 그 시기에 관광도 다니고 한다던데, 우리가 시골에 살 때, 40년쯤 전에는 농한기에 할 일이라곤, 노름이 전부지 않았나 싶다.
물론 우리 아빠의 기준에서다
엄마는 그 시간에도 밀린 일이 많으셨겠지
타고나기를 한량인 아빠와, 그와 대조적으로 생활력이 너무나 강한 엄마가 부부를 이루니 결국 생활력 강한 사람이 나가서 돈벌이를 하게 된 것이다.
엄마가 서울에 가서 직접 돈을 , 그것도 농사에 비해 회전이 빠르고 큰돈을 만지다 보니 엄마는 서울에 가서 살고 싶으셨고, 그즈음에 할머니도 돌아가시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다 망해먹고 올라오는 거라서 낡은 이불 몇 채와 수저, 젓가락이 살림살이의 전부였지 싶다.
서울에 와서 엄마는 하시던 장사를 이어가셨고, 아빠는 막노동을 하러 다니셨다.
위에 언니 둘은 자연스럽게 나를 케어했어야 했다.
둘 다 착한 성품이라 다행히 나를 보는 걸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지만, 사실 귀찮은 일이긴 했을 것 같다.
친구들과 한참 놀고 싶은 나이에도 나는 그녀들의 혹처럼 붙어 있어야 했으니까.
나랑 몇 살 차이 안 났지만, 그 당시 그녀들은 나의 언니이자 엄마였으니까
새 학기가 시작되면 언니 둘이 같은 시간대에 걸릴지 안 걸릴지가 제일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그때 당시는 오전반/오후반 시스템이 있었는데, 다행히 언니 둘이 오전/오후 반에 엇갈리게 편성이 되면 언니들은 나를 바통 터치 하듯 넘겨주고 등교를 해야 했다.
그런데 오전에 등교한 언니가 아직 하교 전에 오후반 언니가 등교해야 하면, 나는 혼자 있기 싫어서 그 언니의 옷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울며 불며 가지 말라고 애원할 때 나의 마음은 너무 서글펐고 두려웠다.
그때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울고 있는 동생을 혼자 두고 가야 하는 언니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졌을지, 그 발걸음은 얼마나 무거웠을지..
그때는 내 삶의 무게가 가장 크게 느껴져서 언니들이 느꼈을 무게감을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미련했고 미안했다.
어떤 해에는 둘 다 오전반으로 가야 할 때가 있었다.
내가 같이 오전반이면 좋은데 나는 언니들과 등교 시간이 맞지 않았다.
엄마는 결정을 내리셔야 했다.
혼자 있는 막내를 어떻게 학교에 늦지 않게 등교시켜야 할지
차라리 학교를 안 다닐 때는 종일 집에만 있으면 됐는데 아직 시간 개념이 정확히 없는 막내가 학교를 제대로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셨던 엄마는 동네에 인심 좋은 이발소집과 내 친구 집을 생각해 내셨다
이발소집 딸은 나보다 3살 정도 많았는데 , 참으로 다정한 언니였다.
선영이라는 언니였는데, 3살 어린 동생을 한 번쯤은 골탕 먹이거나 못살게 굴 수 있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참 재밌었던 기억만 있지, 아픈 기억이 없다.
또 나를 맡기던 곳은 내 친구 집이었다.
친구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내 친구 그리고 친구의 남동생 이렇게 여섯이 사는 집이었는데, 국어책에 나오는 그림 같은 가정이었다.
단란하고, 행복하고, 따뜻한 가정
항상 웃음이 넘치는 가정
그 집을 가면 우리 집보다 따뜻했다.
가끔 돈 때문에 다툼이 있는 우리 집
난방에 잘 안 되는 우리 집보다 그 집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그 집에 있으면 보호받는 느낌을 받았다.
그 가족 모두 나를 사랑해 주셨다.
내가 내 친구의 진짜 가족이면 얼마나 좋을까를 자주 상상했었다.
선영이 언니집이나 내 친구의 집에 갈 때 내 손에 쥐어주던 것이 바로 100원짜리 카스테라이다.
엄마는 장사를 가시기 위에 한 손으로는 큰 다라이를 드시고 , 다른 한 손은 내 작은 손을 꼭 잡고 삶의 터전으로 한 발짝씩 내딛으셨다.
그럴 때마다 꼭 슈퍼에 들러서 100원짜리 카스테라를 사주셨는데, 그게 그 시절 엄마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었지 싶다.
사실 그 시절 카스테라는 우리 가족에게는 사치였지만, 막내딸을 혼자 두고 가는 어미가 자신의 미안함과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그거라도 손에 쥐어줬어야 하는 거였다.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 카스테라
그 부드러운 카스테라가 나에게는 부드럽지만은 않다.
나에게 카스테라는 따갑고 아픈 추억이다.
사실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는..
어린 시절의 나의 상처를 다시 들여다보고 , 어린 나를 토닥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을 떠올리면 아직도 쓸쓸하고 외롭고 아프기 때문에 애써 외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조금씩 용기 내서 나의 이야기를 써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