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연 Aug 06. 2020

치자꽃

강인하고 우아한

지금 일하는 건물 앞엔 제주 시내를 통과하는 산지천이 흐른다. 건입포라 불리는 산지항이 보이는 하류랑 가깝다. 동문시장과 산지항 사이에 위치해 있어서 거기에 조성된 산책로로 출퇴근한다. 산책로 화단에는 제주 자생수가 심어져 있다. 제주에서 보는 나무나 꽃은 잎이 땅땅해서 배짱이 두둑해 보인다. 왠지 그런 친구들 대부분이 제주 자생수일 것 같다.


거기에는 꽃치자도 있다. 출근하다 바람에 불어오는 향기로 알았다. 은은하고 달콤한 향이었다. 6월 중순부터 2달 넘게 매일 보고 냄새 맡았다. 꽃에 코를 가까이 대보면 맑고 풍부한 향이 입가까지 휘감아와 절로 미소를 띠게 한다. 이제 꽃은 지고 거의 없다. 가지 끝에 피는 치자꽃은 2-3일이면 시든다고 하는데, 가지가 많은 수목이라 그렇게 오래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따뜻한 남쪽 지방에 주로 자라는 꽃치자는 햇빛과 물을 좋아한다. 진흙이 덜 섞여 물 빠짐이 좋은 보드라운 사질양토가 잘 맞고 꽃눈이 형성되기 위해 밤 온도는 서늘해야 한다. 또 공기가 좋고 그 흐름이 좋아야 하며 토심(흙의 깊이)이 깊어야 한다. 환경변화에 예민한 편이라 갑자기 장소가 바뀌면 꽃망울이 모두 떨어져 버리거나 잎이 노랗게 변해서 떨어지기도 한다.


꽃치자는 그냥 맞는 환경에서 살아야 되는 나무 같다. 키우기엔 너무 서로 고생 아닌가. 이 친구를 좋아하는 나로서 기분 좋은 점은 얘랑 나랑 좋아하는 환경이 비슷하다는 거다. 이 친구가 스스로한테 맞는 환경에서 잘 살면 내가 그 근처에 있거나 그걸 보러 가거나 하는 게 나는 제일 좋다.


치자꽃에 대해 알게 된 건 몇 년 전 오키나와에 취재 갔을 때다. 나하那覇시 어딘가를 걷는데 같이 간 선배가 길거리에 있는 치자꽃을 보고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라며 향기를 맡아보라 했다. 자연에서 맡아본 냄새 중 최고 우아한 향이었다. 그 두툼한 꽃잎이 강하고 부드러워 그 아름다움을 닮고 싶다 생각했다.


꽃치자는 겹꽃, 홑꽃이 함께 피는데 열매를 맺는 건 홑꽃이다. 둘 다 향기는 좋다. 내가 오키나와에서 반했던 꽃은 홑꽃이었다. 겹꽃이 더 화려하다고들 하는데 난 홑꽃이 압도적으로 좋다. 엘윈 브룩스 화이트 Elwyn Brooks White의 『샬롯의 거미줄』에 나온 샬롯이 환생한다면 치자꽃의 홑꽃과 매우 어울릴 것 같다.


빌리 홀리데이 Billie Holiday의 트레이드 마크로 알려진 꽃이 치자 겹꽃이다. 그는 머리장식으로 귀 위에 커다란 치자꽃 여러 송이를 꽂고 무대에 올랐다. 뮤지션 커리어 초반에 무대 준비를 하던 중 과열된 고데기 때문에 옆머리를 그슬렸는데 마침 클럽의 짐 보관소에서 치자꽃을 팔던 소녀가 있어 그 꽃 몇 송이를 구해와 머리에 난 구멍을 가린 것이 시작이었다 한다.(THE JOY OF PLANTS.CO.UK)


언젠가 따뜻하고 바다가 있는 곳에 집 주위에 숲밭을 가꾸며 살고 싶다. 그때 꽃치자도 심을 것이다. 꽃잎으로 화전도 만들어 먹고, 데쳐서 샐러드에도 넣어먹고 손님이 오면 치자꽃으로 코르사주도 만들어 줄 것이다. 열매로 염색도 하고 싶다. 얇은 피크닉 매트나 커튼을 지어야지.


꽃치자는 열매가 안 열린다고 하는데 홑꽃에서도 안 열리는 것일까?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꽃치자 나무와 치자나무는 다른 종이라는 사람도 있고 치자나무의 겹꽃을 꽃치자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어 헷갈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