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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 Jan 05. 2022

집안일

불안을 딛고 움직이는 자기돌봄노동

불안은 나를 가만히 멈춰있게 한다. 불안에 휩싸일 때면 무엇을 해도 그 일이 나의 우선순위에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디로 갈지 몰라 길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아이가 된 느낌이다. 나는 아이가 아니라서 아이가 된 느낌은 한심하다. 그럴 때 나는 어른스럽게 나를 돌보려고 한다.

 

불안은 눈을 뜨자마자 찾아온다. 이불속에서 한참을 뭉그적거리다 불안을 딛고서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향을 피운다. 돌돌이로 침구 먼지를 떼고 반듯하게 정리한 후 청소기를 돌린다. 몸을 깨끗하게 씻는다.

불안이 조금 씻긴다.

애인이 챙겨준 비타민 E를 먹고 최대한 금양 체질에 맞는 식재료들로 요리를 해 아침을 먹는다. (최대한이라고는 하지만 잘 지키지는 못한다.) 설거지를 하고 디카페인 커피를 마신다. 여기까지 하면 책을 읽을까 요가를 할까 일기를 쓸까 명상을 할까 훌라를 출까 그림을 그릴까 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의 욕구가 올라온다.

불안이 조금 잊힌다.

책상에 앉아본다. 이번달에 할 일과 공부, 올해 할 일과 공부, 읽으려고 사둔 책들을 살핀다. 일기를 쓴다. 주로 어제 한 일, 겪은 일, 내 기분, 내 생각을 적는다.

불안이 조금 달아난다.

책을 읽는다. 매주 하는 미술사스터디에 공유해야 하는 발제를 쓰기 위한 분량을 먼저 읽는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지 못하고 최근에 산 다른 책을 읽는다. 역시 몇 장 읽다가 책상을 둘러본다. 스마트폰을 켜고 강연, 공연, 전시 정보를 살펴본다. 달력을 본다. 미리 정해둔 스케줄을 확인한다. 가고 싶은 게 있으면 예약한다.

불안이 조금 잊힌다.

개인 생활 행정이라고 해야 할까. 관에 뭔가 신청하고 제출하고 그런 일들 말이다. 코로나 백신 예약하는 것도 여기 해당한다. 자꾸 미루게 되는 일들이다. 이런 것을 맘먹고 처리한다. 내 몸이 현실의 땅에 발을 내디딘 기분이 든다.

조금 정신이 든다.

책상에 몇 시간이고 앉아서 책을 보거나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몸을 움직이고 싶어진다. 산책하거나 훌라를 추거나 요가를 한다. 요새는 훌라를 춘다. 훌라를 추면 자연과 연결되는 기분이 들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땀이 살짝 나는 몸 활동을 하다 보면 정신까지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물을 마시고 집안일을 조금 한다. 빨래하거나 설거지한 그릇 정리를 하거나 손빨래를 한다. 나와 내 주변이 깨끗해진다. 이렇게 오후가 된다.

불안이 멀어진다.


폭풍 같은 유급 노동의 시간으로 들어갈 때면 이런 일들을 느긋하게   없고 가장 귀찮은 일이 된다. 불안한 마음이 없어져서일까. 유급 노동을 하면 열심히 트랙 위를 달리는 기분이 든다. 성취감에 뿌듯하다. 한동안은 멋진 사람이  기분도 든다. 프로젝트가 끝날 즈음엔 몸과 마음 건강이 모두 나빠진다. 일하면서 만난 한계 앞에서 내가 보였던 어떤 결정과 태도를 부끄러워하는 과정이 지나간다. 한두  정도 간다. 친구한테 하소연하거나 일기에 쓰거나 잊어버리려고 밤새워 영화를 보거나 한다. 그것에 지쳐서 닥치는 대로 놀다가 다시 불안해져 나를 돌보는 일을 찾아 꼼지락꼼지락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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