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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 Apr 04. 2022

현대무용

간편한 언어는 제쳐두고

일 년에 한 번 정도 현대무용 공연을 보러 가는 것 같다. 언젠가 전시장에서 열린 퍼포먼스에서 현대무용가의 몸짓을 보고 반해버렸다. 음악도 없었고 화려한 의상도 없었다. 무용수는 몸으로 이야기하는 듯했다. 자신의 몸과 완전히 연결되어 근육, 관절, 뼈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몸으로 말하는 것만큼 믿을만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나는 체화된 것에 많이 끌리는 편이다.


지난주에 애인과 국립현대무용단의 '몸 쓰다'라는 공연을 보고 왔다. 한 사람이 추는 춤이 있었고, 다수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춤을 추기도 했고, 둘이서 짝을 지어 춤을 추기도 했고, 다수가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무용수들의 동작은 무언가를 연상케도 했지만 그 의미를 함부로 재단할 수 없었다. 말이 없는 몸짓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로 만들어진 스토리텔링이 없기에 전후 맥락 또한 섣불리 판단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몸쓰다'(안무: 강애순) 프로그램북에 나온 무용수들

간혹 대화를 나눌 때 내가 건넨 말이 본래 의도와는 다른 전제가 붙어 되돌아올 때가 있다. 매번 수정하자니 왠지 모르게 구차스럽고 귀찮다. 누군가 그랬다지. "남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할 의무가 없다." 그럴 때면 그냥 입을 닫는다. 그런데 이것도 쌓이면 꽤 피곤하다. 이런 상황과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것이 나에게는 현대무용수들의 몸짓이다. 관용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뇌 속을 열어 보이듯 대화하는 것 같다. 아무리 평범한 것도 완전히 다르게 느끼며 상대방의 상상을 조금씩 이해해가는 그런 대화.  


현대무용 공연의 감각적이고 은유적인 무대 연출도 흥미롭다. 무대의 모양과 움직임, 조명의 색, 움직임, 밝기 등 또한 무용수들의 몸과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무대 바닥이 움직이면 무용수의 움직임 속도와 방향, 위치가 바뀌고 무대 조명에 따라 무용수의 표정이 달라 보이기도 한다. 커다란 무대의 뒤쪽 조명을 완전히 꺼버리면 관객 위치에서 무대는 반쪽짜리가 된다. 인생을 둘러싼 환경과 닮아 있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크고 작은 해프닝을 맞이하고 헤쳐나가며 살아가는 매일매일, 한 끗 차이로 보지 못하게 되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완전히 다른 세계.


무용공연을 보기 시작하면서 나는  몸과 이어지려 조금씩 애쓰기 시작했다. 몸을 가꾸고 컨트롤하고 싶다는 생각을 넘어 세계와  사이의 매개로서 신체가 품은 가능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구 위에서  신체라는 덩어리가 어디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위에서 조감하듯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도 한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한  판단은 나를  당당하겸손하게 만든다.

땅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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